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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화) 오전 10시 30분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서는 제주4·3 희생자 고 박원길 님에 대한 특별재심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1947년 4차례의 무허가 집회를 개최하여 국내외 정세를 어지럽힌 혐의로 일반재판을 거쳐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이미 징역 6월 형에 대해 올 3월에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검찰과 변호인 모두 망인이 공소사실과 같은 행위를 한 사실이나 증거가 없다고 밝혔고, 검찰은 망인과 유족의 명예가 온전하게 회복하고, 과거사를 바로잡기 위해 무죄를 구형해달라는 최종의견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고 박원길님의 손자 박00님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전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10살,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기억으로는 할아버지가 과자 사주시고, 손잡고 돌아다녔었다. 할아버지는 구멍가게도 작게 하셨다. 매일 낮에 술을 드셨고, 할머니한테 얻어 맞으셨던 기억이 난다. 너무 안타깝고, 이런 기회를 통해 명예를 회복하셨으면 좋겠다. 아버지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 뒤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생전에 할아버지 무덤에 더 있고 싶다고 했었고, 자주 술을 드셨다. 아버지가 우체국에서 일을 했는데, 항상 진급에서 떨어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이익을 당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 때문에 술을 많이 드셨던 것 같다. 이제는 좀 이해가 되고, 많이 안타깝다. 변호인, 관계자들 덕분에 할아버지가 무죄받는 데까지 오래 걸렸지만 고생 많으셨다." 라고 밝혔습니다.

같은 날 오전 11시 10분부터는 4·3수형인희생자 30명에 대한 군사재판 직권재심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무죄선고를 받은 4·3수형인희생자 중에서는 부친을 대신해 연행되었다가, 자택에서 아침식사를 하다가, 소개령에도 갈 곳이 없어 집에 머물다가, 마을청년회 참여했다는 오해를 받는 등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못하고 전국의 형무소에서 수형되었다가 행방불명되신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형을 다 살고 석방되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에 다시 연행되어 제주비행장으로 끌려가 총살 당했던 분도 있었습니다.
유족들의 진술에서 그 간의 아픔과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망 오창하님의 외조카 박00씨는 삼촌이 잡혀가면서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홧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밝혔습니다. 이제는 당신도 고령이고 몸이 불편해 외삼촌의 제사를 모시지 못하고 있다며 무죄를 선고해달라며 진술을 마쳤습니다.

망 고두천님의 조카 고00님은 아버지 형제 중에 본인 부친만 살아남아 모든 집안일을 해왔다고 하셨습니다. 망 고두천님은 작은아버지로 대전형무소에 계신다는 엽서가 와서 따뜻한 옷과 피부약을 보내달라고 적혀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작은아버지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4·3희생자유족회에 참여하다보니 작은아버지께서 대전 골령골이라는 곳에서 희생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10남매를 나았고, 형제의 반은 아버지 형제와 사촌의 양자로 보내 가족의 대를 잇고 지켜려고 노력하며 이런 시대를 살아왔다고 밝히셨습니다. 작은아버지는 이승에서 지금도 맴돌고 있으니 저승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게 해달라며 진술을 마쳤습니다.

망 양병칠님의 조차 양00님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말씀에 따르면, 삼촌이 목포형무소에 계시다는 편지가 왔는데, '억울하다, 아프고 춥다' 라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옷과 약을 보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숙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숙부님이 억울하다 들었다며 무죄판결로 그 억울함이 풀렸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망 이방행님의 동생 이00님은 어린 나이였지만 오빠가 매우 이뻐해줬던 장면과 오빠의 얼굴도 기억이 난다고 하셨습니다. 가족이 모두 일본에 살다가 4·3 이후에 고향을 찾아 제주도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당시 오빠는 학도병으로 히로시마 원자폭탄에도 살아돌아왔다고, 일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한국말도 몰랐다고 합니다. 이00님이 당시 9살이던 어느 아침에 잠 자고 있는데, 경찰이 들어와 오빠를 잡아갔다고 합니다. 언니들이 면회를 가니 오빠가 3년은 형을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대구형무소가 15년 형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이상하다고 생각했답니다. 오빠의 생사를 확인하고자 여러 노력을 했으나 처음에는 재판 증거가 없다며 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는데, 나중에 추미애 국회의원이 수형인 명부을 찾아줘서 이를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이 기록에도 3년 형을 받은 것으로 나오는데, 목포형무소에서 15년 형으로 바뀌어 대구형무소로 갔더랍니다.
언니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언니도 제주도립병원 간호원을 했었는데, 2연대 헌병대 군인이 언니에게 눈독을 드려 억지로 시집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남편을 따라 육지로 갔던 언니는 딸을 하나 낳기는 했으나 화목한 가족을 꾸리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4·3 당시 제주 젊은 여성들 중에는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억지로 군경이나 서북청년단과 강제로 혼인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이에 저항하여 결국 죽임을 당하는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장찬수 부장판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4·3 때 또 다른 희생을 강요당했다" 라며, "이후 이어진 삶이 얼마나 행복했겠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망 김공진님의 딸 김00님은 4, 5세 때 아버지가 잡혀갔고, 목포형무소로 끌려갔다가 총살해서 죽였다고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후 어머니도 재가하여 14세에 사촌이모를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고 합니다.서울에서는 식모살이를 했으나 나이가 어려 금방 쫓겨났고, 길거리에서 자다시피하며 생활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이렇게 고생하며 살지 않았을 것이라며, 가슴 아프고 억울한 심정을 밝혔습니다. 지금은 부산서 살고 계신데, 가끔 영도다리 아래 찬 물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며, 그 차가운 물에 아버지가 잠겨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프다고 하셨습니다. 할머니도 아들이 잡혀가고서는 맨날 한을 하셨는데, 나이가 드니 할머니의 마음이 이해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를 찾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못하니 제대로 보상받겠다며 진술을 마쳤습니다.

망 양두량님의 아들 양홍성님은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 회장이기도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대전형무소로 끌려갔고, 집으로 편지를 보내 책, 옷, 꿀을 보냈다고 합니다. 어릴 적 헤어진 아버지는 사진 한 장이 없어서,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냐 물으면, 어머니가 '너 거울 보라. 그게 아버지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라' 라고 하셨답니다. 살아오면서도 아버지, 할아버지 얘기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께도 물으면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자식들이 잘못될까봐 늘 걱정하며 살아오셨다고 했습니다. 장성하여 대학갈 형편은 못되고, 사관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연좌제 때문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그 즈음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동료와 경찰에 잡혀가서도 동료는 바로 풀려났지만 본인은 '빨갱이 새끼'라며 쉽게 풀려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 4·3 진상조사도 시작하고, 대통령의 사과도 있엇지만 혹여 자식들에게 연좌제 피해가 갈까 쉽사리 유족회 활동을 시작하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2010년부터 유족회 활동을 조금씩 시작하셨고, 이제는 매년 대전 골령골을 찾아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처음 골령골에 같을 때도 밭에서 발견된 유해조각들이 아버지의 유해라는 생각이 들어 항아리에 담아 제주흙에도 묻어드렸다고 했습니다. 72년 만에 아버지의 무죄판결을 받고 자손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끔 하는 것이 본인의 소망이라 밝히시며, 이 재판이 10년만 더 빨리 진행되었더라면 모친께서 살아가셨을 것이라며, 하루 빨리 다른 수형인피해자들의 재판이 진행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망 현승원님의 조카 현00님은 고인의 양자로 그간 양부의 기일을 챙겨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할머니가 얘기했던 것을 떠올려보고, 양부님의 입장을 생각하니 너무 한스럽다고 밝혔습니다. 신체 건장하여 할아버지에게는 늘 대들보 같은 아들이었는데, 원인도 모르게 끌려가 대전과 마산형무소에 있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양부님을 생각해서 늘 본인을 더 사랑해주셨다며, 맛있는 것도 더 챙겨주셨던 것이 기억난다고 했습니다. 양부에 대한 무고한 죄의 누명이 벗겨진다고 하니 추석에 가서 큰 절을 올리고 그 원한을 풀어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노력해주셔서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며, 다른 분들의 이야기까지 들으니 복 받쳤다며, 들어줘 고맙다는 인사로 진술 마쳤습니다.

장 부장판사도 30명 수형인희생자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곧 추석이니, 희생당하신 분들을 위로해드려달라는 말로 재판을 마무리 했습니다.

[관련기사] "재판이 더 빨리 진행되었더라면"... 뒤늦은 무죄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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