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따뜻했던 지난 2월 13일 제주다크투어는 함덕리 4·3 유적을 차례로 둘러보았습니다.
이 날 답사단은 함덕리 관됫모살을 찾아보았는데요. <4·3 유적 I> 책에 나와있는 주소를 들고 주변을 한참 돌았지만 오래된 흑백 사진에 나와있는 것과 비슷한 장소를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일주도로 근처 모래밭이 관됫모살로 추정되는 장소였지만 어디에도 이 곳이 4·3유적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없었습니다.
70년 전 함덕리는 지금처럼 개간이 되어있지 않은 모래밭이었습니다. 당시 함덕리 주민들과 도피입산자 가족 등이 토벌대에 의해 함덕리 모래밭 곳곳에서 학살되었는데요. 이 곳도 그 중 한 곳입니다. 이 곳 주변은 밭으로 쓰이거나 주택이 들어섰는데요. 가까운 곳에서도 건물을 짓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바로 옆에 있는 밭은 아직도 모래밭으로 남아있어 학살이 이뤄졌던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주4·3연구소가 펴낸 <4·3 유적 I>에 따르면, 토벌대는 1948년 12월 1일 마을 인근에 숨어있던 6명을 이곳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토벌대가 주민들 앞에서 한 청년을 무장대의 협조자라는 이유로 총살하려 하자 일제강점기 당시 함덕리 구장이었던 한백흥 노인(韓伯興, 1897년 출생, 당시 52세)이 토벌대 군인에게 "이 청년은 선량한 청년"이라며 "잘못이 있다면 우리가 책임지고 대한민국의 착한 백성으로 만들겠다"고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또 함께 있던 마을유지 송정옥(宋禎玉)도 그와 함께 나서 청년들의 신원을 보증할테니 죽이지말라며 앞장서서 그들을 만류하려 했지만 군인들은 그의 요청을 묵살하고 주민들 앞에서 청년 6명을 총살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군인들이 떠난 후 서북청년단 출신 응원대가 한백흥과 송정옥을 불러내 "똑같은 빨갱이"라며 현장에서 총살했다고 합니다.
또 1949년 1월 19일에는 고사흥(당시 47세) 등 평사동 주민 10여 명이 도피자가족이라는 이유로 이곳에서 총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고사흥의 동생 고사의씨의 증언에 다르면 "이때의 희생자들은 모두 장년 이상의 연로한 사람들이며 집에서 잠을 자다 끌려나가 총살 당했다"고 합니다.
당시 청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용감히 맞선 한백흥 노인과 송정옥 노인을 기리며 함덕리 주민들은 2010년 1월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1243-2번지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