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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9. 오후2시, 군사재판 직권재심 201호 법정 앞
2024.10.29. 오후2시, 군사재판 직권재심 201호 법정 앞

2024년 10월 29일 오후 2시,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는 4・3관련 군사재판 수형인 30명에 대한 직권재심 재판(사건번호 2024재고합18,22)이 열여 피고인 6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망 윤군일은 1948년 1차 군법회의에 회부돼 내란죄로 수형인이 되었다. 그의 자녀 윤00는 판사의 진술하겠냐는 제안에 마이크를 들었다. “당시는 연좌제가 존재했다. 아버지는 1986년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지만, (형무소 복역 후에) 직장에 들어가려고 신원조회를 하니 빨갛게 나왔다. 동네 사람들이 늘 아버지에게 잘해드리라고 했다. 고생 많이 하셨다고. (중략) 아버지는 목포형무소로 간 모양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형무소 문이 열려 집에 돌아와 집에 계셨다. 왜 죄없는 사람을 연행해갔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이렇다 보니 어머니 형제들도 지금은 전부 일본에 있다. 신원조회를 하면 전부 안 된다. (중략) 앞으로는 이런 비극이 없길 바란다.

망 김병열은 1948년 1차 군법회의에서 내란죄 혐의로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그의 자녀 강00은 어머니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임종 전까지 4·3에 대해 일체 얘기를 한 적이 없다. 내가 오늘 재판을 참여하면서 느끼는 것이. 어머니 입장에서는 자식들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지 않았나 싶다. 어머니께서 4·3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하시고 돌아가셨는데, 재판에 와서 내용을 보니 참 정부가 무도하고, 너무 악질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망 김일순은 1948년 1차 군법회의에서 내란죄 협의로 형무소에 복역했다. 그의 자녀 김00은 수형생활 이후 가족이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진술했다.
“나는 1946년생이다. 태어나서는 아버지 얼굴도 몰랐다. 아버지가 형무소에서 나올 때는 내가 나이가 좀 들어서 옷을 벗는 것을 목격했다. 저희 아버지, 어머님도 일절 그런 이야기(4·3사건)를 해주지 않았다. 제사 때 친척들이 모이면 얘기를 하곤 했지만, 나는 여쭤보지도 않았었다. 가난하게 살았던 얘기를 조금 하고싶다. 어릴 때부터 학교도 잘 다니지 못하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도 형무소에 다녀온 후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교도소에 갔다 왔다고 하면 옛날에는 ‘빨갱이’라고 했다. 임시직으로 갔다가도 금방 잘렸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 생활이 굉장히 힘들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재산을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이것 때문에 동생들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 그래도 저는 노력을 해서 지금 아이들도 다 크고, 공부도 잘해서 좋은 직장에 가있다.”

망 윤세선, 강상호는 부부로 1948년 1차 군법회의에서 내란죄로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으나 이날 재판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부부의 자녀 강00은 부모님의 고문 휴유증을 겪던 삶에 대해 진술했다.
“부모님과 같이 살아오면서 이제까지 들어온 이야기를 전한다. 어머니, 아버지는 어업 종사하셨고, 하루는 고기를 많이 잡았고, 동네분들이 돼지를 잡으라 해서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과 나누어 먹었다. 그런데 경찰은 이 돼지를 폭도에게 줬다는 이유로 부모님이 잡혀갔다. 어머니는 50대부터 너무 아프셨다. 어머니가 4·3때 고문을 많이 당했다고 하더라. 들은 말로는 대나무로 손톱 사이에 끼웠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55세부터는 손톱이 없었다. 또 거꾸로 매달아 고춧물을 코에 부어서 60대부터는 걷지를 못했다. 그렇게 살다가 2002년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1993년에 돌아가셨다.”

망 홍성태는 1948년 1차 군법회의에서 내란죄 위반 혐의로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그의 양녀 홍00은 망인의 배우자인 어머님의 안타까운 삶에 대해 진술했다.
“여기 와서 많은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나는 아버지의 양녀이다. 어머니가 혼자 살면서 외로우니까 저를 데려다가 키워주셨는데, 나는 8세쯤 4·3사건 얘기를 들었다. 농사를 짓고 있는데, 순경들이 와서 아버지를 잡아갔다고 한다. 그때가 결혼한 지 2년도 안 된 상태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청각과 언어 장애가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얘기를 가끔 하셨다. 아버지가 참 다정하고, 온화하고, 가정에 성실한 분이었다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울면서 견디며 살았다.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 폭도라 잡혀갔다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어머니는 10여 년 전에 외롭고 쓸쓸하게 돌아가셨다.
담 하나 넘었다고 하고 잡아가고. 그 시대에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내가 당사자는 아니지만, 너무 억울한 희생자라고 생각된다.”

진술이 끝난 후 판사는 잠시 재판을 휴정한 뒤 60명의 망인이 된 피고인들에게 판결의 근거와 이유를 밝히며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무죄판결로 망인이 된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었길 바란다며 재판을 끝냈다.

[관련기사] “55세에 손톱 다 빠진 어머니, 제주4.3 때 대나무로 고문 당하셨더라”

제주의소리, 이동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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