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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 시인 "선작지왓 털진달래     -종이배의 표류기-
김성주 시인 "선작지왓 털진달래 -종이배의 표류기- (2023.3.31. 촬영)

스물두 번째 증언 본풀이

스물두 번째 동안 82명이 이 자리에서 증언했다고 한다. 이 본풀이 마당은 4·3의 기억을 살아남은 이들의 목소리로 전승하고, 상처를 공유하며 치유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여전히 4·3은 진행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며, 오늘의 주제는 재심과 연좌제다.

재심: 확정판결로 사건이 종결되었으나 중대한 잘못이 발견되어 소송 당사자가 다시 청구하여 재판을 함. 또는 그 재판. 형사소송법에서는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서만 허용된다.

연좌제: 범죄자와 일정한 친족 관계가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책임을 지우는 제도 친족이나 가족의 범위는 주로 3촌의 근친이나 처첩에 한정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사실상 없어졌다.

양성홍님과 허호준기자와 증언 대담
양성홍님과 허호준기자와 증언 대담 (2023.3.31. 촬영)

양성홍님 증언

아버지는 내가 3살 때 주정 공장에 수용되셨다가 대전 형무소에서 돌아가셨어.
어머니는 4·3 때 하도 지독하게 당해서 아버지 엽서도 다 태워버리고 나중에 불이익 당할 거 같아 나에게는 일절 4·3에 대해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지.
고등학교 때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었는데 연좌제라는 말을 듣고 꿈을 버리게 되었지. 그때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어.
4·3 때문에 미래가 막혀서 막 살았어, 그때에 누구랑 싸움이 났는데 그놈은 풀려나고 나는 딱 구속되더라고, 그때는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고, 이것도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하면서 3일이나 구속되어 있었지.
그래서 이렇게 막 살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꿈은 버리고 다른일을 하면서 살았어.
어느 날 운명처럼 대전 골령골 학살에 대한 신문기사에 아버지의 이름을 보게 되었어, 동네 사람들과 매년 대전을 방문했지만 솔직히 4·3활동을 앞장서서 하지는 못했어, 혹시나 우리 아이들도 나처럼 피해 볼까 봐, 그래도 옆에서 적극적으로 협조는 했지, 2010년부터는 적극적으로 4·3활동 나서기 시작했어.
한때는 아버지 때문에 영 안되었다는 생각에 원망도 많이 했어,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때 아버지 나이가 고작 27살이라 법정에서 아버지 무죄 받고 목이 메서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아버지는 어떻게 생기셨냐고 물으니 어머니가 “거울 봐라 니랑 똑같이 생겼다. ”라고 하셨어.

그런 아픈 세월을 이겨내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4·3은 부모를 원망하게 하는 삶인 것이다. 부모들도 원망스러운 삶이었는데도 국가는 더욱 그들의 자식까지도 힘들게 몰고 간 것이다.

강상옥님과 이동현연구원 증언 대담
강상옥님과 이동현 연구원 증언 대담 (2023.3.31. 촬영)

강상옥님 증언

아버지는 한라산에 피신했다가 만삭인 어머니와 주정공장에 수용되었지. 얼마 뒤 아버지는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어.
그래서 난 주정공장에서 태어났다고 했어.
아버지는 마포 형무소에 있을 때 한국전쟁이 나면서 북한군 총알받이로 전쟁에서 참가했지. 온갖 고생을 하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이후 담양 경찰서에 귀순했다고 해. 그리고 군대에도 입대했었다고 했지.
제주에 있는 집안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바로 제주에 내려오지도 못하시고 육지에서 머슴도 살고 엿장수도 했다고 해.
39세에 제주에 내려와서 41세에 돌아가셨는데, 사람들하고 어울리지도 못 하고 어느 누구하고도 말도 안 하시고 관공서도 아니 가고 어쩌다 경찰하고 마주치려고 하면 저쪽으로 도망가고 그렇게 지내시다 돌아가셨어.
난 30대에 취업하려다 신원 조회에 걸려서 탈락했었지. 그때에 아버지의 사정을 제대로 알게 되었어. 이렇게 나만의 문제가 아니구나, 동생들도, 자식들도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했었지. 그때 경찰 친구의 도움으로 아버지 기록에 문제가 없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경찰 의견서를 첨부하게 되면서 연좌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아버지는 2021년 3월 16일에 4·3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 그제야 정말로 신원조회니 뭐니 하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거라.
아버지 무덤 앞에서 이제는 그 어느 누구 하고도 말하지 못했던 그 이야기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다고 이제는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어.

이렇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는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함구하고 자식은 또 그들의 자식을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해야 했던 것이다.

오희숙님 , 오계숙님, 오기숙님과  허호준기자 증언대담
오희숙님 , 오계숙님, 오기숙님과 허호준기자 증언대담 (2023.3.31. 촬영)

오희숙님, 오계숙님, 오기숙님 증언

아버지 오화국은 1914년 생이고 어머니 하고는 동갑이주. 할머니가 자식 열둘을 나았는데 아버지만 살아남으셨어.
할아버지도 독자, 아버지도 독자야. 아주 귀한 아들이었어. 그런 아버지는 일제에 맞섰던 농업학교 주역이셨고, 아주 요망져서 독립운동 기념일에 연설문도 낭독하곤 했다고 해.
그런데 세화리 3·1사건 당시 시위하다 연행되어 징역을 살게 되었지 4·3이 나기 바로 전에 부산으로 탈출했어. 그래서 우리 집은 빨갱이 집으로 되었어,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겅헌집에 아이”가 되었지. 이런 사건들로 인해 70년대 우도 간첩 사건 때에도 우리 어머니 그리고 우리 남편인 사위도 잡혀가서 일주일이나 고문을 당했어. 아버지가 밀항했다고 연루시켜서 연좌제를 치른 것이지.
어머닌 그렇게 고문을 당하셨어도 우리들 에게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나중에 인터뷰한 것 보고 알았지 “무슨 말을 골아사 시원할 건가?”
어머니는 바다에 가야 속이 시원하다고 하시고 “속 솜허난 살았져” 라고 하시면서 살았어.
10살 이후로 본 적도 없는 아버지 때문에 결혼하고도 남편도 동생들도 모두 고생했지 그때 당한 고문 휴유증 으로 남편은 아파서 직장도 못가고 할아버지네랑 농사지으면서 살았어 .
이제 아버지가 농업학교 졸업장도 받고 아버지가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알게 되었어.
아버지 비석 앞에서 아버지라고 처음 불러봤어.

그런 일들을 잊지 못하고 맘속 깊이 숨겨야만 했던 일들인 것이고, 현재도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이다.

잊혀지지 않도록, 잊지 말고 , 공감해야 할 일들인 것이 라고 생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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