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곳이 있다면, 제주4·3평화공원(이하 평화공원)과 함께 있는 제주4·3평화기념관(이하 평화기념관)이다. 제주4·3 역사의 기간을 정하는 법적 기준은 7년 7개월(1947.3.1.~1954.9.21.)이다. 이 긴 기간 동안 제주도에서 어떤 사건과 아픔이 있었는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평화공원과 기념관에는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통해 80주년이 다가오는 제주4·3을 알아갈 수 있다.
평화공원은 4·3진상규명운동에 매진하던 민간사회단체 등이 진상규명과 함께 지속적인 위령사업에 대한 요구로 조성되었고, 2008년 평화기념관이 개관하였다. 그리고 평화기념관 전시실의 첫 전시가 “백비(白碑)”이다. 아무것도 새기지 못하고, 세우지 못한 하얀 비석이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높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햇빛을 받은 백비는 우리에게 말한다.
“언제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평화기념관 전시 기획자는 왜 첫 전시로 ‘백비’를 배치했을까? ‘백비’는 아직 제주4·3에 이름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제주4·3이 우리나라 역사임에도 아직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념이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 역사를 왜곡하는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의도에 따라 제주4·3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그래서 평화기념관을 찾은 사람들에게 백비를 새기고 세울 권한을 줄테니 전시를 다 보고 난 후, 각자가 생각하는 이 역사의 이름은 무엇일지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제주4·3은 침묵과 투쟁을 거듭하며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공산반란” 또는 “공산폭동”이 지배적으로 기록되고 불리던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로는 “민중항쟁”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제주4·3사건”으로 명명되었다. 현행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4·3 무장봉기’를 설명하고 있다.
제주4·3 역사의 시작인 1947년 3월 1일 경찰에 의해 발생한 발포사건은 분명 무자비한 공권력의 행사였다. 이에 사람들은 해방 이후 바랐던 국가의 수립부터 미군정의 횡포에 저항하고자 평화로운 3·10총파업을 감행하고, 정당과 조직을 만들어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부 수립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더 가열하게 제주도민을 탄압하고 학살했다. 결국 무장봉기를 통해 제주도민들의 의사를 전달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은 둘로 나뉘고 결국 같은 민족끼리 죽고 죽여야 하는 전쟁을 해야 했다. 친일파는 친미파로 둔갑하여 여전히 민중들을 착취할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제주도민들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 전역에 봉화가 오르고, 무고한 주민들을 가두고 고문하던 지서를 습격했던 산부대(무장대)의 활동을 응원했고, 동의했다. 그래서 이제는 제주4·3을 ‘항쟁’, ‘통일운동’, ‘해방기 제주 통일독립 항쟁’ 등으로 부르자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제주4·3을 겪은 생존자가 많지 않다. 더 늦기 전에, 적어도 다가오는 80주기에는 모두가 부르고 기록할 제주4·3의 이름을 세울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제주도에 있는 평화공원과 평화기념관을 찾아가자. 제주도에 오기 어렵다면, 현기영 작가의 단편소설 「순이삼촌」,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이 역사에 대해 알아가보자. 그리고 각자 제주4·3의 이름을 지어보자. 수많은 죽음에 앞서 통일된 나라를 세우고자 했고, 친일파를 척결하고 서북청년회의 횡포로부터 고통받지 않는 제주도를 꿈꿨던 이들의 뜨거운 마음과 용기가 있던 1948년 4월 3일을 기억하자.
제주4·3의 역사에서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이름이 있다. 바로 가해자의 이름이다. 최근 가해자의 이름 중에 제주도민과 4·3희생자유족에게 다시 고통을 주고 있는 인물들이 있다. 제주도에는 아직도 제주4·3의 가해자를 추모하거나 공덕을 기리는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현기영 작가가 소설 「순이삼촌」에 표현했듯이 “당시 군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서, 두려움에 떨며 비석을 세우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누가 세웠는지도 모르게 존재하는 것도 있다. 그래서 제주4·3관련 시민사회는 이런 비석들을 치우거나, 광주 5·18묘역의 전두환 비석처럼 가해자들을 상징적 처벌하는 방식으로 조치해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이런 요구에 제주도정은 지난해 극우단체가 제주4·3을 왜곡하는 내용으로 옛 경찰지서(파출소) 터에 설치한 추모 표지석에 대한 철거 또는 이설을 요구했다. 그리고 4·3진압 초기 도민들을 탄압했던 국방경비대 9연대장 ‘박진경 추도비’ 옆에 「바로 세운 진실」이라는 안내판을 설치해 추도비의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고, 박진경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역위원회(위원장 최기섭)와 천안지회, 그리고 (사)제주4·3범국민위원회(이사장 백경진)는 천안에 있는 조병옥 박사 생가 앞에 「조병옥의 역사적 과오를 기록하다」라는 제목의 안내판을 설치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가 제주4·3 역사에서 어떻게 제주도민들을 탄압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제주도에 이런 변화가 시도되는 사이, 국가보훈부가 갑자기 박진경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제주도와 제주4·3희생자 유족회 등은 바로 관계부처에 강력히 이의를 제기했고, 며칠 후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통해 국가유공자 인정에 대해 재검토를 지시했다. 그리고 최근 국가보훈부는 사실상 박진경에 대한 국가유공자 인정을 취소했다. 이를 알리기 위해 제주도를 찾은 국가보훈부 장관은 제주도민에게 박진경이 이번에 국가유공자 자격을 인정하는 기준이 된 ‘무공훈장’과 관련하여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철회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진경의 무공훈장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에 대한 공훈에 의한 무공훈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박진경은 1948년 6월 18일 본인의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복귀한 부대에서 자는 중에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를 암살한 죄로 사형에 처한 손순호 하사는 재판 중에 박진경의 무자비한 제주도민 진압 명령이 암살의 배경이라는 진술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박진경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사망했다. 그러니 그가 받은 무공훈장은 여러 가지로 자격이 없다. 그런데도 이재명 정부의 국가보훈부는 70년 전부터 제주도민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억압해온 과거의 기득권을 수호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힘 있는 자들의 것이며 권력에 의해 기록된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많은 투쟁과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권력과 힘의 논리에 밀려 과거의 비극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을 비무장한 시민들이 막고, 군인들이 총을 쏘지 않기로 한 것처럼 더디지만 다른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도 계속 다른 역사를 만들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제주도는 4월 3일을 앞두고 3월 28일, 평화공원 한쪽에 또 다른 가해자인 이승만의 공적비와 함병선(제2연대 연대장)의 공적비를 옮기기로 하였다. 비석을 없애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두고두고 보면서 가해자들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과거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고, 70년 전 더 나은 세상을 꿈꿨던 이들을 추모하는 방법이다. 여러분이 제주도 평화공원에 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김잔디 제주다크투어 대표 | 월간 한국노총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