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주다크투어는 지난해 11월 제주도 내 다크투어 유적지 100곳을 대상으로 안내판 내용을 분석하고 관리상태를 점검하는 활동을 펼치고 이에 대한 결과를 <유적지 안내판 조사보고서>로 발간했습니다. 보고서는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고 제주도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도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앞서 조사한 유적지 중 역사성, 보존의 시급성이 높음에도 유적지 안내판이 존재하지 않거나 안내판 내용이 부실한 10곳의 유적지를 선정해 시민들과 유적지 안내판을 만들어 보고 알리는 시민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편집자말]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는 지난 9월 25일(토) 제주4·3 유적지 시민지킴이단과 함께 제주 서부권 4·3 유적지를 답사했습니다.
제주4·3 유적지 시민지킴이단은 그동안 제주다크투어가 조사한 제주4·3 관련 유적지 가운데 안내판이 존재하지 않거나 내용이 부실한 4·3유적지 10곳을 선정하여 안내판이 세워질 수 있도록 시민들과 함께 진행하는 캠페인입니다.
유적지 시민지킴이단원들은 앞서 2회에 걸쳐 제주4·3 유적지에 관한 사전 조사와 안내판 문구 구성 등을 위한 사전 모임을 하고, 3회에 걸쳐 제주시내권, 서귀포권, 동부권 4·3유적지 8곳을 답사했습니다. (링크 : 지난 답사글 보기)
이날 답사는 조천중학원과 마찬가지로 해방기 제주의 대표적인 중등교육기관인 하귀중학원 옛터, 4·3 발발 초기인 1948년 4월 28일 국방경비대 김익렬 9연대장과 무장대(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이른바 ‘4·28 평화협상’을 벌였던 구억국민학교 옛터를 돌아봤습니다.
가장 먼저 제주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이 찾은 곳은 하귀중학원 2학년 교실 옛터(주소 : 제주시 하귀2리 1715-1)입니다. 지금 이곳에는 한 교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귀중학원은 다른 학교들과는 다르게 1학년 교실 터와 2학년 교실 터의 위치가 다릅니다. 당시 학교 건물은 마을의 공회당을 사용했었는데요. 학교가 설립되고 해가 바뀌어 학생이 늘어나자 교실이 모자랐고 2학년 학생들은 시민지킴이단이 방문한 미수동 공회당 터에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당시 하귀리 주민들은 독립운동가의 마을, 가장 진보적인 마을이라는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하귀리는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활발히 벌어졌던 곳이었고, 하귀중학원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은 1947년 3·1절 기념식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하귀리 마을이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마을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로 인해 일찍부터 미군정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시민지킴이단 참가자 고경빈씨는 “이 동네에 살면서 이곳을 자주 지나쳤지만, 4·3유적지임을 알지 못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엔 어떠한 안내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다른 참가자 박대현씨는 “학교가 한 건물이 아니라 1학년 교실과 2학년 교실 터가 다른 게 신기하다”라며 2학년 교실 옛터를 쭉 둘러보기도 하셨습니다.
하귀중학원이 설립된 시기에는 미군정과의 마찰은 없었지만, 3·1절 발포사건으로 인명피해가 발생하면서 미군정과 제주도민 간의 갈등은 점점 격화되어 가던 때였습니다. 제주도민들은 3·10 민관 총파업으로 대응했고, 당시 하귀중학원도 파업에 동참한 곳 중 한 곳이었습니다. 미군정이 탄압으로 일관하면서 하귀중학원 교사들과 학생들은 검거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산으로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그 바람에 학교에는 학생들이 들쑥날쑥했고, 재정난까지 겹치면서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민지킴이단은 앞서 사전 자료 조사를 통해 구성한 유적지 안내판을 들고 어느 곳에 안내판을 설치하면 좋을지 터를 둘러보다가 인도와 인접한 교회 입구에 안내판을 세우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시민과의 접근성 면에서 좋은 위치인 것이죠. 안내판 모양이 기존의 획일적인 사각형이 아닌 4·3의 상징인 동백꽃 모양으로 만들면 사람들의 이목을 더 효과적으로 끌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도 나왔습니다.
다음으로 찾은 유적지는 하귀중학원 2학년 교실 옛터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하가리에 있는 육시우영(주소 : 애월읍 하가리 1386-1번지)입니다. 육시우영은 저희가 애초에 선정한 유적지 10곳에는 포함되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나 4·3 당시 무고한 주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차별 학살을 당한 곳이지만 기억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점에서 당초 우리가 선정한 유적지 10곳과 비슷한 성격을 띱니다.
1948년 11월 13일 초토화작전이 자행되던 당시, 외도리에 주둔해 있던 9연대 군인들이 갑자기 하가리 마을에 들이닥치면서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날 하가리 주민들은 마을에 제사가 있어 제사를 끝낸 후 음복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토벌대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폭도 모의를 하는 것으로 오해해 학살극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재 이곳은 개인 소유의 부지로, 당시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안내판은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시민지킴이단 고유리씨는 “학살터에 방문하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았는데, 막상 와보니 이곳이 학살터였다는 게 전혀 믿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원진씨는 옆에 있는 전봇대를 가리키며 “이곳이 4·3 당시 학살터였음을 알리는 이정표라도 설치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박대현씨는 “안내판을 세우기 어렵다면, 건물 담벼락에 QR코드라도 새겨 지나가는 이들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등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애초에 선정한 유적지 10곳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안내판을 따로 제작하지는 못했지만, 휴대폰 화면 속 육시우영에 얽힌 사건을 글자 하나하나 곱씹으며 그날을 기억해 보았습니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구억국민학교 옛터(주소 : 구억리 861번지, 866-1번지 일대)입니다. 이곳은 1948년 4월 28일 제9연대 김익렬 연대장과 당시 무장대 사령관이었던 김달삼이 ‘4·28 평화협상’을 벌였던 곳입니다.
현재 이곳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나머지는 농경지로 남아있습니다. 한 예술단체에서 이 아파트 화단에 세운 작은 표지석만이 이곳이 ‘4·28 평화협상’이 벌어졌던 곳임을 알리고 있으나, 이마저도 풀숲에 가려져 제대로 된 안내판의 역할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시민지킴이단은 퍼포먼스 시작 전, 전정가위로 화단에 우거진 풀들을 깨끗하게 정리했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표지석에는 ‘4·28 평화협상’에 관한 개요나 의의 등에 대한 내용이 없어 이 일이 4·3의 전개 과정에서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4·28 평화협상의 주요 내용은 ①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변을 보장한다 등이었습니다. 평화협상은 성사되는 듯했으나 며칠 후인 1948년 5월 1일 오라리 연미마을에서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방화사건으로 결렬되고 맙니다. 처음에는 무장대의 소행으로 알았던 김익렬 연대장은 마을에 직접 찾아가 조사를 벌였고, 방화사건이 무장대가 아닌 우익청년단원들의 소행임을 밝혀냅니다. 김익렬 연대장은 조사 결과를 미군정에 보고하지만, 미군정은 이를 묵살하고 ‘폭도들이 자행했다’는 경찰 측의 보고를 수용하면서 결국 오라리 방화사건은 4·28 평화협상이 결렬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시민지킴이단은 오라리 방화사건 외에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5·3 기습사건에도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5·3 기습사건은 평화협상의 타결로 산에 올랐던 주민들이 9연대 군인과 미군의 인솔 아래 하산 도중 무장대로 가장한 자들에게 기습 총격을 당한 사건입니다. 장창국의 『육사졸업생』에 나온 내용에 따르면 공격을 가했던 자들이 무장대가 아닌 제주경찰서 소속임이 밝혀졌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김익렬 연대장의 유고록에서도 습격을 가한 자들이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들의 귀순공작을 방해하기 위한 하나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자백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평화협상을 원치 않았던 경찰의 조작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시민지킴이단은 평화협상이 틀어진 원인 중 하나로 바로 이 사건이 주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의견을 나눴습니다.
시민지킴이단은 오라리 마을 안내판 내용에 있는 ‘만약에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4·28 평화협상이 내용대로 진행되었다면 7년 7개월의 고통의 세월은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라는 문구를 직접 제작한 안내판 내용에 넣고 그 문구를 곱씹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보기도 했습니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4·3 전국화를 위해 꾸린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제주다크투어는 조사중 김익렬 연대장의 조카분을 만났던 에피소드도 시민지킴이단에게 공유했습니다. (관련 기사 : [바다너머4·3]“국회의원도 마다하고 끝까지 군인으로…” )
시민지킴이단은 아파트 화단에 세워진 작은 표지석 앞에 자리를 잡고 인간안내판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당시 역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공감할 수 있도록 유적지 실소유주와의 협의를 통해 평화협상 의의와 내용 등을 안내판을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이날 답사를 끝으로 시민지킴이단이 선정한 유적지 10곳에 대한 현장 답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영실씨는 마지막 답사를 마무리하며 “앞으로도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서 4·3유적지를 보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다음에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마지막 답사에 참여하지 못하신 참가자들도 매우 아쉬워하며, 앞으로도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지속해 달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마지막 답사를 마치며
시민지킴이단은 4개월에 걸쳐 유적지에 대한 사전 조사 및 현장 답사를 진행했는데요. 지킴이단이 지키기 위해 찾아간 유적지는 모두 10곳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수백 개에 달하는 4·3유적지들이 관심 밖에 놓여있습니다. 제주4·3을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알려 나가기 위해서는 이 같은 유적지들이 더 잘 보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행정적인 차원에서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도 시급하지만, 유적지들이 오래오래 유지되려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 또한 중요합니다. 제주다크투어가 시민 참여형 캠페인을 진행하는 이유도 시민들 스스로가 유적지를 지키는 주체가 되어 시민들의 관심을 제고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앞으로도 시민참여형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여 시민들과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여 제주4·3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전승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제주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활동은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하는 <변화의 시나리오 스폰서 지원사업>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코로나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유적지 답사를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