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주다크투어는 지난해 11월 제주도 내 다크투어 유적지 100곳을 대상으로 안내판 내용을 분석하고 관리상태를 점검하는 활동을 펼치고 이에 대한 결과를 <유적지 안내판 조사보고서>로 발간했습니다. 보고서는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고 제주도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도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앞서 조사한 유적지 중 역사성, 보존의 시급성이 높음에도 유적지 안내판이 존재하지 않거나 안내판 내용이 부실한 10곳의 유적지를 선정해 시민들과 유적지 안내판을 만들어 보고 알리는 시민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편집자말]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는 지난 18일(토) 제주4·3 유적지 시민지킴이단과 함께 제주 동부권 4·3 유적지를 답사했습니다.
제주4·3 유적지 시민지킴이단은 그동안 제주다크투어가 조사한 제주4·3 관련 유적지 가운데 안내판이 존재하지 않거나 내용이 부실한 4·3유적지 10곳을 선정하여 안내판이 세워질 수 있도록 시민들과 함께 진행하는 캠페인입니다.
유적지 시민지킴이단원들은 앞서 2회에 걸쳐 제주4·3 유적지에 관한 사전 조사와 안내판 문구 구성 등을 위한 사전 모임을 하고, 지난 7월 10일, 24일 제주시내권 및 서귀포권 4·3유적지 다섯 곳을 답사했습니다. (링크 : 지난 답사글 보기)
이날 답사에서는 해방기 제주의 대표적인 중등교육기관으로 제주4·3 발발 직전 제주도 민심에 불을 댕긴 학생 고문치사 사건과도 큰 연관이 있는 조천중학원 옛터, 제주4·3 기간 중 수많은 주민을 학살한 서북청년단 특별중대가 약 3개월간 주둔했던 서북청년단 특별중대 옛터, 토벌대가 오조리 주민 20여 명을 ‘다이너마이트 사건(또는 던지기약 사건)’으로 집단 총살한 곳인 우뭇(묵)개동산 등 3곳을 돌아봤습니다.
가장 먼저 제주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이 찾은 곳은 조천중학원 옛터(주소 : 제주시 조천읍 신북로 264)였습니다.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된 이후 제주도는 교육 열기에 휩싸였습니다.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마을마다 초등학교 세우기 운동이 전개되었고, 면 단위별로 중등학교 세우기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조천중학원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6년 개교했습니다.
교사들이 모두 일본에서 공부한 유학생들로 구성되어 하귀중학원과 함께 교육 수준이 매우 높은 학교로 손꼽혔는데요. 인민유격대(무장대) 2대 사령관인 이덕구도 교사로 재직하며 역사와 체육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조천중학원은 1947년 3·1절 기념대회와 같은 날 벌어진 경찰의 민간인 발포사건, 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으로 미군정과 서북청년단의 주요 표적이 되었습니다. 이후 학생과 교사가 수시로 잡혀가 고문을 당하는 등 모진 탄압으로 사실상 수업이 어려워졌습니다.
지킴이단이 방문한 조천중학원 옛터 바로 맞은편에는 조천파출소가 있는데요. 지금의 조천파출소 터에 ‘조천지서’가 있었습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서로 맞닿아 있는 조천중학원 옛터와 조천지서 옛터, 4·3 당시 조천중학원 교사들과 학생들이 매일같이 경찰의 감시를 받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48년 3월 6일 조천중학원 2학년 김용철 학생이 조천지서에 연행되어 조사받던 중 고문치사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역 주민들은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경찰은 이 사건을 은폐하기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부검 결과, 김용철 학생이 외부 충격으로 인한 뇌출혈이 사인으로 밝혀지면서 조천지역은 물론 전도의 민심이 들끓었습니다. 학생들은 조천지서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두려움과 공포감에 산에 오르는 학생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천중학원은 결국 4·3이 발발하면서 폐원조치되었습니다.
조천중학원 옛터 바로 옆에는 ‘조천지서 앞밭’인 4·3 당시 조천지역 주민들과, 중산간에서 소개해 내려온 주민들이 학살당한 학살터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천지서 앞밭 또한 당시의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판은 그 어디에도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시의 역사는 묻힌 채 그저 ‘밭’으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반면, 조천지서 옛터(현 조천파출소) 앞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당시 군·경의 잘못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경찰관 순직 등 경찰의 피해 사실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표지석에는 ‘폭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국가에서 정식 채택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폭도’가 아닌 ‘무장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주4·3정립 연구·유족회와 제주4·3경찰유족회의 이름으로 세운 표지석을 보며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이름 하에 또 다른 왜곡과 갈등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웠습니다. 불법적으로 세워진 이 표지석은 사유재산이라는 명목으로 관에서는 그대로 두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대로 된 안내판이 반드시 설치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시민지킴이단원들은 앞서 사전 자료 조사를 통해 구성한 유적지 안내판을 들고 어느 곳에 안내판을 설치하면 좋을지 의견을 모았습니다. 선정한 10곳의 유적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조천지서와 조천지서 앞밭 학살터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조천중학원에 안내판을 세우게 된다면 나머지 두 곳의 이정표도 같이 새겨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다음으로 찾은 유적지는 서북청년단 특별중대 옛터(주소 : 성산읍 성산리 179-4번지)입니다.
이곳은 성산동국민학교가 있었던 곳으로, 제주4·3 당시 수많은 주민을 학살한 서북청년단 특별중대가 약 3개월간 주둔했던 곳입니다. 서청 특별중대의 정확한 주둔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민간인 피해가 가장 컸던 초토화 작전 전개 시점인 1948년 11월 전후에 이곳에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북청년단은 남과 북이 나뉘는 시기에 한반도의 서북지역, 즉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지역 사람들이 남한지역으로 내려와 결성한 단체인데요. 북한지역에서 친일파 청산과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등 정치적 변화에 내몰려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이라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습니다. 이들은 ‘제주는 빨갱이 섬’이라고 교육받아 제주도민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신분으로 주민들의 생사여탈군을 쥐고 무소불위의 군력을 휘둘렀으며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한 주범입니다.
2004년 당시 사진과 최근 사진을 비교해 보면 과연 이곳이 같은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이 훼손된 상태입니다. 시민지킴이단원 최원진 선생님께서는 “지난 답사 때는 건물 지붕이 있었는데 이것마저 다 무너져 내렸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오은주 선생님께서는 무너져내린 펜스를 바라보며, “민간인이 소유하고 있는 유적지를 매입하는 등 보존 및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현재 이곳은 흉물스럽게 방치된 사유지로 남아있으며, 녹이 슬어 위태롭게 휘어져 있는 펜스와 곳곳에 가득 방치된 쓰레기들이 보는 말문을 막히게 했습니다.
시민지킴이단은 건물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유적지 앞에서 인간안내판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우뭇(묵)개동산(주소 : 성산읍 성산리 103-1번지 일대)이었습니다. 우뭇개동산은 성산일출봉 봉우리가 보이는 넓은 들판으로 4·3 당시 토벌대는 오조리 주민 20여명을 일명 ‘다이너마이트 사건(또는 던지기약 사건)’으로 집단 총살했습니다.
해방 이후 일본군이 버리고 간 다이너마이트는 주민들이 어로활동을 하는 데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4·3 당시에는 주민들이 인민유격대의 공격에 대비한 마을 경비용으로 마을 초소마다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9연대와 맞교대하며 이곳에 주둔한 2연대 군인들은 주민들이 다이너마이트로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다며 마을 이장, 민보단장 등 20여 명을 총살했습니다.
이 사건은 새롭게 제주에 파견된 군인들이 지역에 대한 몰이해가 발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학살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취지의 증언도 있습니다. 9연대를 이어받은 2연대의 과도한 경쟁의식과 실적 과시가 무차별적인 주민 학살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매년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이곳은 성산일출봉의 빼어난 절경과 푸른빛 바다만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줄 뿐, 당시의 역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흔적조차 사라져버렸습니다.
시민지킴이단은 탁 트인 광장 근처 길게 이어진 울타리에 자리를 잡고 인간안내판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시민지킴이단의 안내판 퍼포먼스는 지나가던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붙잡기도 했습니다. 발걸음을 멈춘 채 한참을 주시하던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 캠페인의 중심은 시민입니다. 말 그대로 시민의 힘으로 4·3을 기억하고 지킨다는 제주다크투어의 슬로건과 상통하는 프로젝트인 것이죠. 비록 작은 한 걸음이지만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걸어가며 제주4·3과 시민들 사이의 거리를 더욱 좁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