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당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김두황 할아버지(92)가 재심을 통해 72년만에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번 무죄 판결은 특히 의미가 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김두황 할아버지가 '일반재판' 수형인이기 때문입니다.
4·3 당시 제주에서는 일반재판과 불법 군사재판(군법회의)이 진행됐습니다. 군사재판의 경우 앞서 지난 2019년 1월 18명의 생존수형인분들이 무죄(공소기각) 판결을 받은 사례가 있을 만큼 이미 그 불법성이 인정되어 속속 재심 절차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재판은 다른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군법회의는 재판 기록조차 존재하지 않는 등 절차적 정당성의 결여가 명백했지만, 일반재판의 경우 이의 불법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날 재심에서의 무죄 선고가 역사적 의미를 갖습니다. 재판부는 김두황 할아버지에게 씌워진 혐의가 허위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72년 전 선고된 유죄 판결을 뒤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4·3 피해자 구제의 새 지평이 열린 것입니다.
이날 무죄 선고를 한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 장찬수 부장판사는 법정에서 “해방 직후 국가로서 온전한 정체성을 갖지 못했을 때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벌어진 제주4·3에서 이제 갓 20살이 넘은 청년이 반정부 행위를 했다는 명목으로 실현이 선고된 사건”이라며 “이로 인해 한 개인의 존엄이 희생되고 삶이 피폐해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92세의 피고인은 그동안 하소연도 한번 못하고 자신의 탓이거나 운명으로 여기며 살아왔을 것으로, 그 피해가 얼마인지 가늠하기 어렵다”며, “오늘 선고가 피고인에게는 여생의 응어리를 푸는 작은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라고 밝혔습니다.
김두황 할아버지는 선고 직후 법정에서 재판장과 대통령에 감사의 뜻을 전하셨으며, 이어 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따뜻한 봄이 왔다”라며 감격스러운 심정을 밝혔습니다.
한편, 최근 제주다크투어는 김두황 할아버지 댁을 방문해 할아버지로부터 인생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희가 들은 것만 최소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4·3이 발발해 경찰의 취조를 받을 때 한 번, 목포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 한 번,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예비검속이 이뤄졌을 때 한 번.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50년 초에 출소하지 못했다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국적으로 이뤄진 수형인 학살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제주에서 이뤄진 예비검속으로 경찰서에 구금되었을 때 故 문형순 경찰서장이 계엄사령부의 학살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할아버지는 이 자리에 계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사정 당국의 감시와 가족들에 대한 연좌제 피해로 혹독한 세월을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1967년에는 난산리 이장직을 맡아 마을 발전에 힘쓰셨다고 합니다.
두 시간 가량 이어진 인터뷰 중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4·3은 다신 오지 말아야 하고, 오게 만들지도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