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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까지 이어진 고통, 지금이라도 무죄판결로 명예회복 돼야

2023년 11월 28일 오전 10시30분, 오후 2시 30분,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서는 제42, 43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재판(사건번호 2023재고합40, 2023재고합42)이 열렸다. 이날 재판에는 군법회의 수형인 4·3 피해자 대부분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제주비행장에서 사형이 집행되거나, 한국전쟁 등으로 행방불명된 이들이다.

오전 재판의 다섯번째 피고인 망 김희만은 제주 화북리 출신으로 1949년 7월 1일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중에 풀려난 후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조카 이00은 법정의 증언을 통해 그에게까지 미친 연좌제의 사연을 밝혔다. 그는 원래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경찰관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좌제에 의해 꿈을 이룰 수 없었다고 했다. 오늘 무죄판결을 자녀들에게도 전하겠다며 망인의 무죄판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망 채평호는 조천읍 와산리 출신으로 1949년 6월 29일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유해를 찾지 못해 사형이 집행되었는지, 육지형무소로 보내졌는지 알 수 없다. 거의 조카 채00은 "저도 아버지를 통해 망인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늘에 와서야 자세한 내용을 알게되었다. 아직도 망인이 돌아가신 날짜를 몰라 임의로 정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라고 가슴 아픈 사연을 밝혔다.

망 강용생은 조천읍 와흘리 출신으로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 그는 마포형무소에 있다는 엽서를 가족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에 풀려나 행방불명되어 가족들은 아직도 그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재판정에 참석한 그의 조카 송00은 "내가 외삼촌을 대신하여 피고인석에 앉아있으리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자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니도 돌아가셨기 때문에 정말로 감회가 깊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줘서 정말로 고맙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망 양승후는 제주읍 삼양리에서 살다가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법정에 참석한 그의 남동생 양00은 "아버지가 생전에 나에게 큰형이 아무런 죄도 없이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잡혀갔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내가 크면 꼭 한번 형을 찾아보라며 1963년에 돌아가셨다. 너무 어릴 때라 이것 말고는 4·3에 대해 들은 것이 없어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다."라며 소회를 밝혔다.

망 김병용은 제주읍 노형리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토벌대에 붙잡혀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가족은 그가 인천형무소에 있다는 엽서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에 인민군이 형무소의 문을 열어줘 나온 후 행방불명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조카 김00은 집안의 장남이라 부친의 생전후로 망인에 대한 기록을 해놓기도 하고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왔다고 하며, 재심으로 무죄판결의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망 양재섭은 조천읍 와산리 출신으로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실제 사형이 집행되었는지 여부나, 어디서 사망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날 법정에는 조카 양00은 울음을 참으며 "부친은 참전용사였는데, 부친의 형은 빨갱이가 되었다. 우쪽(중산간)마을에 사는 이유로 이렇게 되었다. 해안(마을)에 살았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안타까움을 토했다.
그의 말처럼 4·3 역사 전반적으로 중산간 마을의 주민은 무장대가 숨어지내던 한라산과 가깝다는 이유로 토벌대에 의해 무차별적인 탄압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 해안마을 주민들은 토벌대의 보호를 받으며 상대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예외적으로 북촌리나 곤을동 등 일부 해안마을에서 토벌대의 보복학살 등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당한 곳이 있었다. 이를 보면, 당시 정부 또는 군경토벌대가 얼마나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제주도민을 학살했는지 알 수 있다.

이어진 오후 재판의 피고인 망 김기남은 성산읍 난산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26세 청년이었다. 4·3이 발발하고 마을의 젊은이들이 토벌대에 연행되자 산으로 피신했다가 토벌대에 붙잡혔다.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6월 28일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2일 지금의 제주국제공항이 있는 제주비행장에서 사형집행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조카 김00은 어릴 때부터 큰 가족행사때마다 망인에 대한 것 때문에 불화가 심했고, 이게 가족인가라는 회의감을 느껴왔다고 했다.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내다가 오늘 같은 날을 맞이하게 되어 한없이 기쁘다는 소감을 남겼다.

망 한일봉은 조천읍 와산리 출신으로 조천중학원에 재학 중인 젊은 청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토벌대에 잡혀가 1949년 6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기록이 없어 아직 행방불명인 상태이다. 그의 외조카 고00은 "외할아버지도 4·3때 돌아가시고, 외삼촌은 6·25때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1973년 한이 맺힌 상태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도 혼자였다. 부친은 연좌제에 걸려 공무원시험에도 떨어지는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라며 너무 억울한 마음을 밝혔다. 이이서 "아무도 돌보지 않은 증-고조부부터 망인까지 제사와 벌초를 남편과 살피고 있다. 돌아가신 날짜도 몰라 9월에 지내고 있고,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도 알 길이 없다."라며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다.

망 박성찬은 제주읍 도평리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26세 청년이었다. 그는 1949년 1월 경 토벌대에 연행되었고, 7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후 행방불명된 상태이다. 그의 아들 박00은 아버지 형제 중에 4명이 4·3에 희생되었다며 당시 나이가 어려 잘 몰랐고, 어느 형무소로 갔는지 백방으로 찾았으나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살면서도 망인이 4·3행방불명자라서 직장을 다니가다 출근을 못하게 된 경험도 있다며 이번 재심재판으로 망인과 가족들의 명예가 회복되길 바란다는 바람을 밝혔다.

이제 1천 명이 넘는 수형인들이 재심재판을 통해 무죄선고를 받았다. 4·3에 대한 진상규명 과정에서 희생자 피해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확인되고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43차의 재심재판 과정에서 희생자의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연좌제의 피해가 굉장히 일반적이었고,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체적인 연좌제 피해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조사 결과나 기록이 많지 않다. 이제 희생자뿐 아니라 유족들의 연령도 고령화되고 있기 때문에 하루 빨리 연좌제에 대한 기록작업이 진행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여러 세대를 거쳐 영향을 미치고 있는 4·3의 현상들에 대해서도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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