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4월 봄을 기억해주세요
3월 28일 경향신문 19면(전면)에 제주4•3 유적을 돌아보는 기행 기사가 실렸습니다. 경향신문의 취재에 제주다크투어 활동가들이 동행했습니다. 경향신문 기자님과 함께 제주다크투어가 진행하는 '제주4•3 과거와 현재' 코스와 산전길 걷기 코스를 돌아보았습니다.
제주에 도착하면 첫 발을 내리는 제주공항 활주로에서 아름다운 서우봉까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기억들이 제주 곳곳에 녹아있습니다.
이번 봄엔 제주4•3을 보고 느끼는 '다크투어'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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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글·사진 김형규 기자
아직도 정명(正名)을 찾지 못한 제주 4·3사건이 올해로 71주년을 맞는다. 이미 긴 세월이 흘렀다며 화해와 용서를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4·3의 진실은 아직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책임자 처벌도 적절한 피해 보상도 없었다. 여전히 4·3은 더 많이 기억되고 말해야 할 주제다. 조금은 특별한 제주 여행으로 4·3 관련 유적지를 찾는 ‘다크투어’를 권하는 이유다.
다크투어는 전쟁이나 테러, 재난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찾아 성찰과 교훈을 얻는 여행을 말한다. 현재진행형의 아픔이 있는 제주만큼 적당한 곳도 없다. 4·3 유적은 섬 전체에 널려 있다. 현재까지 파악된 학살지, 은신처 등만 해도 600여곳이다. 이 중엔 사유지로 방치되거나 난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곳도 허다하다. 4·3을 알리는 비영리단체 ‘제주다크투어’의 안내로 대표적인 4·3 유적을 돌아봤다.
■잃어버린 마을의 기억
한라산 중산간의 ‘큰넓궤’는 1948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진행된 군경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살 곳을 잃은 안덕면 동광리 주민들이 두 달가량 숨어지내던 곳이다. 4·3을 다룬 영화 <지슬>의 배경이자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큰길에서 안내판을 따라 비포장도로에 접어들어 한참을 달리고서야 목적지에 닿았다.
궤는 동굴이란 뜻이다. 크고 넓은 동굴이란 이름과 달리 아래를 향해 뻗은 동굴 입구는 지름이 1m 정도로 좁았다. 무릎을 꿇고 기어서 천장이 낮은 구간을 통과하자 널따란 공터가 나왔다. 구석 바닥에 깨진 옹기 조각 등 피란 당시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동굴 안쪽으로 더 들어가는 길목엔 토벌대를 막기 위해 쌓은 어른 허리 높이의 방어용 돌담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무심코 손전등을 위로 비췄다가 코앞에 매달린 박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불을 끄면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그 어둠보다도 굶주림보다도 바깥세상이 더 무서웠기에 동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한겨울을 버텼을 것이다.
큰넓궤에 숨어든 이들은 ‘삼밭구석’ ‘무등이왓’ 등 근처 마을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130여가구가 살던 무등이왓 마을은 지금 터만 남아 있다. 구불구불 돌아들어가는 올레길은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초가집이 있음직한 자리엔 전부 대나무와 잡풀만 무성했다. 사람들 왕래가 잦았을 마을 게시판 자리와 학교 터 역시 안내판이 없다면 모르고 지나칠 황무지였다.
마을 입구에 세운 기념비엔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이라고 써 있었다. 잃어버린 게 아니라 ‘빼앗겼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먹고 자고 피붙이와 뒹굴던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불타 없어진 상황, 봄햇살 내리쬐는 한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그 지옥도를 상상하기 쉽지 않았다.
■백명의 조상, 하나의 자손
좀 더 직접적인 죽음의 흔적을 찾아 섬 남쪽으로 향했다. 대정읍 섯알오름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으로 끌려온 252명이 계엄군에게 총살당한 현장이다. 한림읍과 모슬포 두 곳에서 끌려온 교사, 공무원, 학생, 농민 등 무고한 민간인들은 1950년 8월20일 새벽 이곳으로 끌려와 집단 학살당했다. 시신은 오름 가운데 두 개의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소식을 듣고 유족들이 달려왔을 땐 이미 고무신과 옷가지 등 희생자들의 유품이 불타고 있었다. 증거인멸을 위한 조치였다. 억울한 죽음이 알려지고 소송을 통해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기까지 그로부터 65년이 걸렸다. 유족들은 그 배상금을 모아 섯알오름 입구에 희생자 추모비와 명예회복 진혼비 등 기념물을 설치하고 사건 개요를 적어놨다. 오름 둘레를 한 바퀴 빙 돌아 만든 추모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울타리를 둘러친 학살장소가 내려다보인다.
유족들은 학살이 벌어지고 6년이 지난 1956년에야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학살지 두 개의 구덩이 중 왼쪽 구덩이에서는 모슬포에서 끌려와 희생당한 149기의 유해가 발견됐다. 소지품 등으로 신원이 확인된 17기는 가족에게 돌아갔고, 나머지 132기는 큰 뼈만 간신히 모아 한데 묻었다.
유족들은 그곳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 이름붙였다. 백명이 넘는 서로 다른 조상이 한날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은 이제 모두 한 자손이라는 뜻이다. 대정읍 상모리 백조일손묘역은 100기가 넘는 무덤을 좁은 부지에 모셔 봉분의 크기가 작고 납작하다. 유족들은 매년 음력 칠월칠석에 함께 모여 벌초를 한다.
백조일손묘역에 설치된 위령비는 섯알오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꼭대기에 올린 조각에 태극기와 무궁화가 크게 새겨져 있다. 악랄한 국가폭력의 희생자이면서도 여전히 국민의 일원임을 인정받고 싶다는 강한 뜻이 읽혔다. 일견 모순적이지만 그런 ‘정상성’에 대한 갈망이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오랜 세월 ‘폭도 가족’ ‘빨갱이’라고 손가락질받으며 연좌제에 시달렸을 유족들의 한스러운 삶이 연상돼 마음이 쓰렸다.
■4·3의 오늘 보여주는 세 무덤
4·3은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진아영 할머니 삶터’는 그 잔인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장소다. ‘무명천 할머니’로 불리는 진 할머니는 1949년 1월 한경면 판포리에서 토벌대가 난사한 총에 맞아 아래턱을 잃었다.
할머니는 제대로 먹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 얼굴을 무명천으로 칭칭 동여맨 채 옆마을 월령리로 이사와 이웃과 왕래 없이 혼자 살았다. 제대로 씹지 못해 평생 소화불량으로 고생했고 화장실에 갈 때도 방문에 자물쇠를 채울 정도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2004년 9월 진 할머니가 후유장애를 앓다 별세한 뒤 풀뿌리 시민단체인 ‘제주주민자치연대’에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 담장을 개보수하는 등 할머니 집을 관리해왔다. 2017년부터는 사단법인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보존회’가 만들어져 체계적인 보존이 이뤄지고 있다. 유족·후손이나 국가의 도움 없이 시민사회의 힘으로 만들고 가꿔온 유일한 4·3 기억공간이다.
두 칸짜리 간소한 집에는 생전에 할머니가 쓰던 손때 묻은 유품과 총에 맞기 전 사진 등이 전시돼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진 할머니 집이 있는 월령리는 천연기념물인 선인장 군락지로 유명하다. 할머니 집에서 바닷가로 조금만 걸어나오면 갯바위와 선인장이 어우러진 해안길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파도소리 들으며 걷기 좋다.
남원읍에 산재한 세 묘지엔 1949년 1월 의귀초등학교에서 벌어진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전투로 숨진 이들이 묻혀 있는데, 여전히 비틀린 4·3의 현재를 극명히 보여주는 장소다. 먼저 남원읍 충혼묘지.
1만㎡에 달하는 부지에 군경 사망자의 묘와 비석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죄없는 민간인을 도륙하는 등 입에 담지 못할 악행을 저지른 이들도 ‘애국자’로 모셔져 있다.
전투 여파로 군인들에게 총살당한 주민들은 사건 발생 54년 만인 2003년 유해 발굴과 이장이 이뤄져 자손들이 마련한 ‘현의합장묘’(의로운 넋들이 함께 묻혔다는 뜻)에 묻혔다.
전투에서 궤멸당한 무장대 50여명의 시신은 흙으로 대충 덮은 채 의귀초등학교 인근 ‘송령이골’에 반세기 넘게 방치됐다. 누구도 손대지 못하고 잡풀과 관목만 무성하던 무장대의 가묘는 2004년 도법스님이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을 이끌고 와 천도재를 지낸 후에야 간신히 무덤 꼴을 갖췄다. 매년 광복절에 벌초 행사가 있지만 이들을 찾는 후손은 아무도 없다.
■공항이 바로 역사의 현장
관광지와 동떨어진 4·3 유적에 일부러 들르기 힘들다면 잘 가꿔진 기념관을 찾아 추모와 기억의 행렬에 동참할 수도 있다.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4·3 기념관’은 단일 사건으론 가장 많은 430여명의 희생자를 냈던 북촌마을 학살을 추모하는 장소다. 너븐숭이는 학살이 일어난 북촌마을 지명이다. 넓은 쉼터, 혹은 평평한 바위가 있는 널따란 곳이라는 뜻이다.
북촌리 학살은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으로 널리 알려졌다. 기념관에는 현기영이 집필 전 취재를 다닐 때 사용한 손바닥만 한 소니 녹음기가 전시돼 있다. 기념관 한쪽엔 4·3 때 희생된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애기돌무덤 20여기가 있어 방문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다.
중산간 넓은 부지에 2008년 들어선 ‘제주 4·3 평화공원’은 평화기념관과 위령탑, 봉안관, 행방불명인 표석, 평화교육센터 등이 갖춰진 대형 추모시설이다. 특히 기념관의 전시물은 해방 직전부터 시기별로 4·3의 배경과 진행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제주 출신 강요배 화백의 회화 작품을 비롯해 조각과 미디어아트 전시 등 각종 예술 작품도 4·3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기념관 2층에선 지난 2월부터 ‘어쩌면 잊혀졌을 풍경’이라는 제목의 4·3 생존희생자 그림기록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시는 다음달 14일까지다.
기념관은 4·3의 의인(義人)도 소개하고 있다.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자기 가족까지 인질로 잡혀가며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성사시켰고 훗날 회고록을 남겨 4·3의 진실을 후세에 알렸다. 독립군 출신의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예비검속자 학살을 독촉하는 해병대 정보참모의 명령서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써서 돌려보냈다. 문형순은 모슬포경찰서장으로 옮겨가서도 무고한 희생을 막아 모슬포 주민들이 세운 공덕비가 아직 남아 있다.
사실 비행기를 타고 제주를 방문했다면 누구나 4·3의 현장을 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 정뜨르비행장으로 불렸던 제주공항은 4·3 때 학살과 암매장이 이뤄진 장소다. 2007년부터 2년 동안 진행된 발굴작업을 통해 활주로 옆에서 388기의 유해와 2000여점의 유품이 수습됐다. 아직도 공항 주위엔 수백명의 희생자들이 더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행기를 타고 뜨고 내릴 때 지하의 원혼들을 위해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4·3 다크투어 가이드
비영리단체 ‘제주다크투어’는 지난해 국내외 60여개 단체, 1300여명과 4·3 유적 답사를 진행했다. 잊힌 4·3 유적을 발굴·기록하는 일도 병행한다. 현재 ‘4·3 첫발 딛기’ ‘4·3의 과거와 현재’ ‘산전길을 걷다’ ‘원도심 다크투어’ 등 4가지 기행 코스를 운영하고 있다. 오랜 세월 4·3을 연구·조사한 최고의 전문가들이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다. 세부 코스는 협의해 조정할 수 있고, 생존자 증언을 들어볼 수도 있다. 단체 기행 예약은 제주다크투어 홈페이지(www.jejudarktours.org)에서 할 수 있다. 소정의 참가비를 내야 한다.
제주관광공사는 올해 5~7월, 9~11월 매주 토요일 총 25회에 걸쳐 두 가지 코스의 ‘4·3 다크투어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참가비 등 자세한 내용은 4월 중순 공개된다. 문의 제주관광공사 문화관광팀(064-740-6971).
제주도는 4·3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걷기여행길인 ‘제주 4·3길’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4·3길은 오라동, 북촌마을, 가시마을, 의귀마을, 동광마을, 금악마을 등 6곳에 있다. 제주 사람들의 시련과 애환을 함께한 퐁낭(팽나무)을 상징 로고로 활용해 길 곳곳에 초록색 바탕의 안내판을 설치, 순례를 돕는다. 미리 예약하면 4·3길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도 있다. 문의 제주특별자치도 4·3지원과(064-710-8454).
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경훈 시인(57)은 20년 이상 4·3을 조사하며 기록을 남겼다. 김 시인의 4·3 순례 시집 <까마귀가 전하는 말>에는 현재까지 밝혀진 4·3 관련 유적들이 거의 망라돼 있다. 들고 다니며 현장에서 읽으면 큰 도움이 된다.-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