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국민학교
- 제주4·3유적지 안내판이 없는 곳
- 해방된 조국에서 졸업하게 된 기쁨을 나누기 위해 '대한민족 해방기념비'가 세워진 곳
- 제주4·3의 중요한 계기인 1947년 3·1절 기념행사로 6천 명 운집한 곳
<4·3유적지 시민 안내판>
대정공립국민학교(현 대정초등학교) 34, 36, 38회 졸업생들이 일제강점기에 한 무명교사의 민족 교육에 감명 받아 5년간 헌금을 모아 1950년 '대한민족 해방기념비'를 세웠다. 광복 이후 순수 민간단체가 민족 해방기념비를 건립한 것은 전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4·3 사건의 시발점이 된 1947년 3·1절 기념행사는 제주북국민학교, 조천, 대정국민학교에서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제주시까지 가기 어려웠던 대정면민 6,000여 명이 모여 이곳에서 기념행사를 진행하던 중 일부 청년층의 주도로 시위가 이어져 지역 인사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시위를 주도했던 일부 청년층이 남로당이었다는 이유로 당시 계엄군이었던 모슬포 부대장(김윤근)이 토벌대에게 지시, 마을 주민들이 사상 불순분자로 몰아 대정국민학교와 근처 모슬포 절간 고구마창고에 구금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마을 주민들은 상처를 지닌 채 평생을 힘겹게 살아왔지만, 토벌에 참여했던 계엄군은 5·16 군사 정변의 주요 인사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참
- 제주다크투어 홈페이지
- 남제주군, (1996),「 남제주군의 문화유적 」
- 대정읍지편찬위원회, 2014, 「대정읍지 II」
<어디에 있나요?>
- 주소: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대서로 15(상모리 2864번지) 대정초등학교
- 찾아가려면: 일주서로에서 모슬포 시내로 진입해서 직진하면 옛대정면사무소 건물이 보이고, 지나자 마자 운동장이 보이는 학교 대문이 보인다.
<시민지킴이단이 이곳을 조사 유적지로 선택한 이유>
- 대정초등학교에는 대정국민학교의 4·3관련 역사를 알리는 안내판이 없습니다. 대정읍면의 광장이기도 했던 대정국민학교의 중요한 역사를 담은 유적지 안내판이 필요합니다.
- 제주다크투어와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2기는 이곳에 4·3유적지 안내판이 설치되길 바라며, 자세한 역사적 사실을 담은 시민행동을 진행합니다.
<제주4·3과 대정국민학교>
- 대정면의 3·1절 집회는 대정국민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6000명의 군중들로 대성황을 이룬 가운데 진행되었다. 가파도에서도 100여명의 주민들이 어선을 타고 나와서 행사에 참여할 정도였다. 기념식은 이운방의 사회로 대정중 교장 이도일과 일제시대부터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벌여온 이신호 등의 연설로 진행되었다. 기념식이 끝난 다음에는 2부 순서로 교실 안에서 대정중학생들의 연극공연이 마련되어 있었다. 기념식의 폐회선언이 있은 직후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일부 군중들은 연극 공연장으로 들어가거나 귀가 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운동장 한복판에서 청년층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행렬 대열로 돌입한 것이었다. 시위행렬은 운동장을 몇 바퀴 돌면서 열기를 돋우더니 교문 밖으로 박차고 나갔다. (「4·3은 말한다」1, 289쪽)
그 시위는 사전에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갑자기 생긴 난맥의 데모 행렬을 정리해 보려고 애를 써 봤지만 역부족이었지. 나는 대단히 걱정하면서 대회장에 남아 있었는데, 얼마 후에 그들은 무사히 귀환했어. 그런데 되돌아온 시위행렬 선두에 이승진이가 이것 보라는 듯이 학생들과 어깨를 끼고 입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겠어. 불쾌한 생각이 들더군. 분명히 시위 여부는 그날 역원회의에서 의논하기로 된 것인데 그런 절차도 없이 감행된 것이었어. 나중에 이승진은 그날 정세를 잘 파악하고 확신을 가지고서 시위행동을 감행했는데도 오히려 내가 이것을 제지하려고 노력했다고 비난하더군.- 대정면의 3·1절 집회 상황에 대한 이운방옹의 증언「4·3은 말한다」1, 290쪽
- 3·1 사건을 이후 서울대 사무국장으로 있던 서울 출신 김영배가 신임 제주경찰감찰청장으로 발령되었다. 신임청장은 제주도민과 경찰 사이가 대단히 유리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직접 지방을 돌며 강연회나 좌담회를 열기도 하였다. 첫 강연회는 1947년 4월 20일 대정국민학교에서 열렸다. 이호 특별수사과장과 전문순(田文淳) 총무과장을 대동한 김 청장은 모슬포 주민 300여명이 모인 강연회에서 건국이념에 대한 여러 갈래의 각도가 있음을 설명하고 민중은 선동모략에 휩쓸리지 말고 조선사람이 나아갈 바를 정시해 줄 것을 역설했다. (「4·3은 말한다」1, 407-408쪽)
- 대정초등학교 정문을 들어서 오른쪽에 70년 가까이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비가 있다. 제주 근현대사를 함께 한 공간에서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대한민족해방기념비(大韓民族解放記念碑, 높이 171㎝·전면 폭 56㎝·측면 폭 34㎝)'다. "겪어보지 않으면 그 걸 어떻게 알아" 이창백 옹(92·대정초 34회 졸업)의 짧은 말에는 해방이란 단어가 던진, 그날의 가슴 벅참이 함축돼 있다. 대한민족해방기념비의 시작은 1945년 당시 대정국민학교를 졸업한 34회 졸업생들이다. 제주 삼도리 출신 김영택 교사(1916~1948)가 가르치던 반 학생들이 일본에서 벗어나 해방된 조국에서 졸업하게 된 기쁨을 나누기 위해 뜻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졸업 후 1년여 성금을 모았지만 해방 직후 혼란기에 어린 학생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허순칠 전 농협 도지부장(89·대정초 36회)은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때"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34회에 이어 36회, 그리고 38회 졸업생 중 뜻을 같이한 이들이 마음을 모아 1950년 뜻을 이뤘다. (제민일보, [제74주년 광복절] "해방이 되었으니 이 어찌 통쾌하지 아니한가!", 2019.8.14.)
<대한민족해방기념비 비문>
대한민국은 창업 이래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나라가 발전하였으며 강토는 아름답고 문물은 찬란하여 여러 민족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어졌다. 그러나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을 입어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를, 고려는 글안을 물리쳐 이 땅을 지켜왔고 민족정기를 보전하는 전통을 세웠다. 아! 한말에 이르러 왜국이 청국과 노서아를 이긴 뒤 우리 겨레를 강압으로 경술합방의 조약을 맺어 우리의 자주권을 빼앗았다. 그 후 36년간의 굴욕은 일찌기 반만년 역사에 없었던 일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조국 광복을 위하여 항일 운동을 그치지 않고 해내외에서 수많은 의사와 열사의 그 장한 순국과 위국충절은 천추에 빛났다. 그 결과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에게 일본은 항복하고 우리 민족은 왜놈의 굴레에서 드디어 해방이 되었으니 이 어찌 통쾌하지 아니한가! 우리들은 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이 비를 세워 이 민족의 해방을 기념하는 바이다 .
- 6.25 당시 공군사관학교는 대정국민학교로 임시 이동했다. 현재 학교 화단에는 공군사관학교 훈적비가 남아있다.(제주의소리, 50만 신병 배출로 나라 구해낸 ‘살아있는 6.25박물관’ 제주 모슬포 땅, 2020.06.25.)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활동>
- 2022. 10.12. 시민지킴이단 2기 4조 사전답사
- 2022.10.~12. 유적지 자료조사
- 2022. 12.15. 시민지킴이단 2기 시민행동
시민지킴이단 2기가 주목한 4·3유적지 더보기
#2.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대정국민학교
#4.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빼앗긴 마을 영남동
#12.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성산동국민학교 서북청년단 특별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