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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청소년에게 사형선고, 납득하기 어려운 군사재판

2024년 1월 16일 오전 10시 30분,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서는 제44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재판(사건번호 2023재고합44)이 열렸고, 30명의 피고인들에게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날 재판에는 군법회의 수형인 4·3 피해자 대부분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제주비행장에서 사형이 집행되거나, 한국전쟁 등으로 행방불명된 이들이다.

이날 문성윤 변호사는 모두 망인이 된 피고인들의 사연 중에 인천형무소에서 병사한 사례가 많았고, 18세의 청소년에게 사망선고한 사례를 언급하며 4·3 당시 군사재판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비상식적인지를 지적하며 재판부에 무죄를 선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어진 피고인 유족들의 발언을 소개한다.
망 김경환은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군사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의 조카 김00은 이날 재판에서 "이런 재심의 기회에 무죄 판결을 내려 주셔서 감사하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망 문창하는 애월 고성리 출신으로 1948년 내란죄 위반으로 대구형무소로 보내진 후 행방불명 되었다. 그의 동생은 법정에서 "하고 싶은 말은 변호사님이 대신 해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양민이 이렇게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라며 울먹였다.

망 양경택는 제주읍 아라리 출신으로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마포형무소로 보내졌다가 인천소년형무소로 이감됐는데, 이후 사망했다. 그의 조카 양00은 "(재심재판이) 상징적으로 진행이 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 (울먹) 여기 나오신 많은 분들이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짧은 시간에 바로 잡히는 것 같지만. 그때의 아픈 상황들은 정말... 바로잡게 해줘서 감사하다"라고 밝혔다.

망 하용현은 제주읍 해안리 출신으로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대전형무소를 거쳐 마포형무소에 수감 중 한국전쟁 중에 옥문이 열려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조카 하00은 "나의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다. 큰아버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아버지가 살아있을때도 큰아버지를 보고 싶어서 찾아 헤맸었다. 지금이라도 역사가 바로잡혀서 감사한 마음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망 양대원은 제주읍 회천리 출신으로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이 죄목이었다. 그의 조카 양00은 "제가 알기로는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작은아버지(망인)께서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다고 들었다. 다행히 제주4·3희생자유족회를 통해 유전자 검사를 했고, 정뜨르비행장에서 망인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4·3평화공원 유해봉안실에 모시고 있다. 4·3희생자유족회의 책임자들에게 고맙다. 유전자 검사를 정부차원에서 해준 것에 대해서도 고맙다는 말씀 드린다."라며 다행히 망인의 유해를 찾아낸 이야기를 전했다.

망 부원옥은 구좌 세화리 출신으로 1948년 내란죄 협의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그의 양자 부00은 "저는 중학교 1학년때 망인의 양자가 되어 잘 몰랐다. 성장하면서 작은아버지(망인)가 누구나처럼 군경에 잡혀 대구형무소로 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이번 재심과정에서 변진환 검사를 만나 진실을 알았다. 변진환 검사가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다. 많은 분들의 덕분으로 오늘과 같은 재판이 열려 (망인이) 무죄로 밝혀지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이 재판이 끝나더라도 유족들의 아픈 가슴을 어떻게 보듬을지가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망 김양기는 대정 출신으로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사형이 집행되었는지 여부의 명부가 없는 상태이다. 그의 손자 김00은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를 포함 여섯분이 4·3때 돌아가셨다. 할머니도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가 세살 때라고 하는데... 군사재판을 작년에 알게 되었다. 이 내용을 알게 되니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자라온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나마 아버지 계실 때 할아버지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이야기했다.

망 김병욱은 제주읍 오등리 출신으로 1948년 내란죄 위반으로 사형을 당했다. 그의 조카 김00은 벌써 셋째 아버지에 대해 "망인이 당시 25살의 나이에 처형을 당했을 때,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두려워겠는가. 이후 2살이 되나마나한 자식은 죽고, 부인은 지금까지도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 항상 안타까움을 갖고 있다. 우리 집안은 비극이 유독 심했다. 우리 큰고모님이 붙잡혀 갔다는 것을 안 할아버지와 사위는 큰고모를 만나러 갔다가 총살당했다. 큰아버지와 (둘째)아버지는 마포까지 끌려가서 지금까지 생사를 모른다. 망인은 4·3당시 신변에 위협을 느껴 피했던 것인데... 우리 가족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형제가 1948년에 모두 돌아가셨다. 남은 가족은 흩어졌고, 여덟살이던 사촌형과 네살이었던 저만 남자로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4·3을 알고 부터는 사형수 집안은 감옥에 끌려간 죄인의 집안이라는 그늘이 드리웠는데. 오늘 마지막으로 셋째 아버지가 무죄선고를 받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러나 죄가 있던 없던,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인 당시 권력자와 관계된 사람들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유족에게 사과를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으로서 우리가 4·3의 참혹함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잊어야 할 것이다. 오늘에 있기까지 힘써준 모든 관계 단체에 감사하다"라고 망인의 전체 가족에 얼마나 큰 아픔이 있는지 전했다.

망 오성도는 남원 의귀리 출신으로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손자 오00은 "할아버지는 제주농업학교 다니는 학생이었다. 무죄라고 주장했는데도 사형을 당했다. 10년 전에 제주공항에서 DNA검사로 할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 지금이라고 무죄가 밝혀져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망 이근생은 조천 함덕리 출신으로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이 죄목이다. 그의 조카 이00은 "잘못된 공권력으로 인해 선량한 시민인 우리 작은아버지의 무고한 생명을 희생하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아프다. 잘못된 공권력으로 우리 할아버지, 그의 아들 작은아버지가 희생된 얘기를 부친에게 많이 들었다. 아버지가 당시 20대 후반이었다. 얼마나 어려운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아버지도 희생될 뻔한 것을 집안 마루 바닥에 숨어서 겨우 생명을 구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무튼 잘못된 판결을 지금에 와서 재판부와 검사, 변호인이 현명한 판단으로 무죄를 확정해 주심에 감사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망 오재두는 표선 가시리 출신으로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군사재판을 받았다. 그의 손자 오00은 법정에 참석하여 "매년 4·3공원가는 길이 무겁기도 했지만. 오늘 이 재판 이후로 할아버님 묘비 앞에서 조금은 무거운 마음을 놓을 수 있어서 감사드린다. 이 자리를 빌어서 많이 힘들어하셨을 할아버님을 생각하면서 무겁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다"라고 말했다.

치매걸린 노모, 아들 보며 '오라방 왔구나.' 4·3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

이어진 오후 2시 30분,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서는 제45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재판(사건번호 2023재고합46)이 열렸다. 이날 재판에는 군법회의 수형인 30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제주비행장에서 사형이 집행되거나, 한국전쟁 등으로 행방불명된 이들이다.

유족들의 발언에 앞서 김정은 변호사는 강건 부장판사에게 무죄 선고를 요청하면서 "2년 가까이 재심이 진행되며 많은 분들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근거 없는 내용으로 왜곡된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라고 지적하며 억울하게 죽어간 4·3희생자들의 명예가 일부의 망언으로 훼손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망 김병주는 제주읍 오등리 출신으로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 중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손자 김00은 "나도 외부에서 이런 재판이 진행되는 것만 알았다.직접 와서 보니까... 순간 죄 없는 상황에서 무죄를 외치고 싶었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이 자리를 통해서 만천 하에 알릴 수 있는 부분에 손자로서 감개무량이다. 무죄판결문이 나오면 할아버지, 할머니 묘에 찾아가 큰절로 인사드리고 싶다"라고 울음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망인의 조카 김00은 "나는 고 김병주님의 조카로서 4·3당시 태어나지 않았다. 숙부님이 형무소에 갔다는 소식을 알았지만 어릴 때는 모르다가 나이 먹어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런 죄 없는 양민을 무차별하게 데리고 가서 무기징역이라는 형을 구형하고 형무소로 갔다는 것을 말이다. 한 많은데, 저희 부친께서 저의 둘째형님을 양자로 둬서 우리 조카도 태어났다. 지금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이 자리에 참석해서 검사님이 희생자들의 무죄 공소사실을 설명할 때 눈물이 났다. 이제나마 무죄 판결을 받아 구천을 맴도는 숙부님이 평안하시길 이 자리를 빌어 바라겠다."라고 심정을 밝혔다.

망 양흥휴는 애월 광령리 출신으로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조카 강00은 "저는 피고인의 외조카다. (울먹) 얘기하려니 자꾸 뭐가... 제 어머니가 지금 요양원에 있다. 이제 치매가 와서 어머니를 찾아가면 외삼촌 얘기를 한다. 저보고 '오라방 왔구나' 하신다. 4·3 당시 한밤 중에 집으로 누가와서 외삼촌을 데리고 가버렸단다. 가족들은 외삼촌이 어떻게 된지도 모르고 이제까지 지내왔다. 외갓집에서 어머니 혼자 지내면서 어머니 머릿속에는 자식보다도 외삼촌이 먼저인 것 같다. 외삼촌에 대해서는 어머니한테 언뜻 들었지 외가에 가면 양자가 있지만 호적 정리가 안돼서 신경을 별로 안쓰는 것 같다. 우리 세대야 4·3이후에 태어나 그때 당시는 관심있게 듣지도 않았다. 외갓집이라 더 그랬다. 오늘 이렇게 재심을 받게 되어 고맙고, 오늘 감명 깊게 여러분의 얘기를 들어서 고맙게 생각한다."라고 가슴 아픈 사연을 전했다.

망 안길수는 조천 조천리 출신으로 1949년 국방경비법을 위반하여 가족과 이별하였다. 그의 조카 안00은 "돌아가신 큰아버지는 당시 결혼을 했었다. 2년 동안 살다가 어느 날 안보였고, 행불이 되었다. 유해를 못 찾고 있다. 큰아버님은 집에 있던 옷가지를 챙겨서 헛묘를 만들었다. 제가 6살 때부터 형님이 양자로 들어가 제사를 챙겼다. 제가 결혼하면서 제사를 전부 물려 받아 하고 있다. 어렸을 때도 친지들 앞에서 이런 사실을 크게 말을 못했다. 4·3 관련해서 나쁜 쪽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죄 지은 것처럼 위축이 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터지자 아버지도 해병대 3기로 지원했고, 군생활 35년 하다가 작년에 제대했다. 연좌제의 입장이었으나 할아버님이 적극적으로 노력하셔서 피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국가가 이렇게 해결해주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고인의 유해를 못 찾았기 때문에 국가가 한시적으로라도 적극적으로 유해 발굴을 해줬으면 좋겠다. 그런 아픔을 달래줄 방안을 연구해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망 문원봉은 조천 함덕리 출신으로 1949년 내란죄 혐의로 목포형무소로 보내졌다가 행방불명 되었다. 그의 손자 문00은 "할아버지가 행방불명되고, 할머니는 개가를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외삼촌 댁에 얹혀 살았다. 그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히 알 수 없다. 당시 3살의 아이(부친)가 지금 요양원에 와상상태다. 판결문을 읽어드리며 그 아픔을 덜아드리고 싶다. 유해발굴 되어서 유족의 품으로 돌아가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망 고승주는 애월 하귀리 출신으로 1949년 국방경비법을 위반했다하여 영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6촌 동생 고00은 "어릴적이니까. 4·3 당시에 무장대가 우리집에 와서 쌀이나 식기를 끄집어내서 가지고 가버렸다. 아버지와 잠을 자는데, 무장대가 아버지보고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우리 아버지는 몸이 항상 약해 무장대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이웃집에 한 분은 끌려가서 그날 무장대에게 희생되었다. 그 기억밖에 없다. 오늘 우리 큰 형님이 4·3 당시 군사재판에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이제 무죄를 받게 되었다"라며 소감을 남겼다.

망 최봉우는 애월 곽지리 출신으로 1948년 내란죄 혐의로 목포형무소로 보내졌다가 겨우 가족의 품으로 겨우 돌아왔다. 그의 딸 최00은 "나는 1943년생이다. 5살 때, 집에 있는데, 경찰 복장의 사람들이 아버지를 포승해서 양쪽에 끌고 가는 것이 잊을 수가 없다. 그 후로 아버지 얼굴을 못 봤다. 아버지 계신 곳이 목포인가, 광주인가 있다고 했으나 말만 들었다. 하도 고문을 당해서 그런가 마지막에 집에 왔을 때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고, 뼈만 앙상했다. 삼촌이 아버지를 모시고 왔는데, 힘이 하나도 없었다. 뼈만 앙상했던 아버지만 기억이 난다. 무죄 판결을 내려 달라. 스무 살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일자무식으로 지금까지 살았다. 너무 억울하다."

잠시 휴정을 한 후, 무죄 선고를 앞두고 강건 판사는 모든 수형인 유족들이 볼 수 있도록 수형인 명부를 화면에 띄우고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오늘 직권재심이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경과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사실 우리나라 사법체계에서 재심의 성립요건은 매우 까다롭다. 그러나 특별법이 개정되면서 이것이 모두 일사천리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입법의 중요성이 다시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강판사는 판결문에 담긴 자료를 요약하여 참석한 유족들에게 배포했다. 그리고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이 어떻게 행방불명으로 기록되는지에 대한 내용을 세세히 설명했다. 검사들이 이 자료를 모아 파악하는데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사실도 전했다. 강판사가 이렇게 시간을 들여 유족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유족들이 평소 느꼈을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는 판사의 노력으로 보인다.

이날 법정에는 김한규 국회의원도 함께 방청했다. 그는 주변 방청 시민들이 어찌 왔느냐고 묻는 질문에 '실제 재심재판을 찾아 어떤 내용으로 진행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 방청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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