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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5일 오전 10시,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서는 제10, 11차 일반재판 직권재심 재판(사건번호 2024재고합 8, 10 병합)이 열렸고, 이미 망인이 된 20명의 피고인들에게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들은 제주 전역에 거주하는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던 도민으로 토벌대에 연행되어 적법한 절차를 보장 받지 못하였으며, 일부는 수감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한국전쟁 때 예비검속으로 결국 죽임당하는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

망 송영봉은 대정면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20세 청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폭도들에게 협조했다는 명목으로 잡혀가 무릉지서에 구금되었다가 1949년 3월 8일 내란방조죄 위반으로 금고 1년 6월의 형을 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1950년 6월 2일에 출소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예비검속 명령이 떨어져 잡혀갔다가 1950년 8월 20일 섯알오름에서 군인에게 학살되었다. 그의 조카 송00은 "당시 숙부님의 상황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수시로 큰아버지가 억울하게 돌아가셨으니 한을 풀어 달라고 말씀하셨다. 이번 재판에서 억울함을 꼭 풀어주시길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밝혔다.


망 박두반은 도두리에 살던 41세 가장이었다. 그는 어느 날 경찰에 연행된 후, 1949년 3월 14일 법령 제19호 위반으로 금고 1년 6월 형을 선고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1950년 6월 10일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한국전쟁 중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도두봉에서 집단 총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법정에는 그의 아들 박00이 참석하여 당시의 잔인했던 상황을 전했다.

우리 모친이 살아 계실 적에 아버지 시신이라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도 찾지를 못했다. 4.3당시에 아버지가 목포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나왔다. 그런데 아버지를 사상범이라고 해서 경찰지서에서 끌려갔는데 행방불명되었다. 우리 어머니가 하르방 시신이라도 봉구젠 백방 알아보니 사라봉에 시신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곳에 가니 기가 막힌 장면을 봤다. 나는 소학교 3학년으로 북국민학교 다닐 때다. 어머니가 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째 왔냐고 하니 나랑 갈때가 있땐해. 어디웁꽈 해서 사라봉에 쓱 가다보니까. 남쪽에 막 파헤친 자리에 왜놈들 굴울 파놓은 데가 있다. 그곳에 사람 죽은 시체가 꽉 차있더라. 겹겹이 쌓여있더라. 내가 어머니께 "아버지 시체를 어떵 챙깁니까?" 하니까. "너네 아버지는 왜정 때 손가락 다쳤으니 손만 찾으면 된다"라고 해서 나는 굴 속을 찾아보고 어머니는 시체를 뒤지는데, 사람이 찾아지겠는가. 내가 본 것은 그렇다. 상당히 억울하다.
제주다크투어 방청 채록

망 문일화는 노형리에 살다 마을이 불타 이호리로 소개하였다가 어느 날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는 1949년 3월 16일 법령 19호 위반하였다는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아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49년 6월 15일 석방하여 집으로 도착했으나 다음 날 사망하였다. 그의 손자 문00은 법정에서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고모님이 생존해 있다. 할아버님은 28세로 4식구가 농사 짓고 살았다. 4.3을 겪으며 지내다가 초가집도 불타버려서 이호리로 갔다고 한다. 이호리에서도 소개되어 도두리로 갔다. 할아버님이 젊으니 돌로 성 쌓는 일을 경찰 지휘 하에 했다. 성을 모두 쌓고 출입문 4곳에서 보초를 섰었다. 그러던 어느 새벽 2시 경에 할아버지가 보초를 섰는데, 폭도의 습격이 들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다. 경찰이 보초 서는 네 사람을 불러 폭도와 내통했다고 지목했다. 그러고는 쌀 세 가마니 값을 주면 할아버지를 풀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형편이 어려워 할아버지는 목포형무소 독방에서 살다가 야산에서 돌깨는 죽노동을 했다더라. 결국 병환으로 사망하게 될 것 같으니 경찰이 석방시켜주겠다고 해서 석방조사를 마치고 군인 2명 인솔 하에 제주항에 내렸다. 관덕정 근처에 사는 친척분이 할아버님을 인계 받아 1박을 하고 다음날 친척분들이 집으로 모셔왔다. 와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다 말씀하시고 얼마 안되서 돌아가셨다"라고 전했다.

망 김신하는 이호리에 거주하던 청년이었다. 그는 어느 날 경찰에 연행되어 1949년 3월 16일 내란방조죄 위반으로 금고 3년을 선고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풀려났으나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자녀 김00은 법정에서 "저는 망인의 막내딸이다. 우리가 담배 장사를 했다 .여섯 살 때인 어느 날 아버지 가 없어져 찾아보니 도두리 함바로 끌려갔다더라. 나중에 확인해보니 아버지는 목포형무소로 갔다고 들었다. 몇 년 지나 한국전쟁이 터지니 다 총살해서 죽였다고 하더라. 집안 어른들이 정한 아버지의 생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어머니한테 들어보니 아버지는 뭐한 인물도 아닌데 그런 일을 당했다고 하더라"라고 사연을 전했다.

망 부재흥과 부재옥은 오등리에 서 농사를 짓던 평범한 농민이었다. 이들은 양민증이 없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1949년 3월 21일 법령 제19호 위반으로 목포형무소로 보내졌다가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 되었다. 이들의 증손자 부00은 "저희 세대는 4.3을 겪지 않았지만 부모님, 조부모님께 들어 많이 느끼고 알고 있다. 억울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이 재판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원한을 풀어드리고, 남아있는 유족들에게 큰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바람을 밝혔다.

망 윤용혁은 당시 23세 이도리에서 옹기 도공으로 일했다. 그는 무장대에게 쌀 두 되를 줬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어 1949년 3월 21일 법령 제19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불상의 형무소로 보내졌다가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조카 윤00은 당시의 상황을 밝혔다.

나는 이도이동 물통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다. 갑자기 어느 날 군인들이 여성들이 빨래하는 곳에 들이닥쳤다. 느닷없이 사람들 다 모아 놓고 총살을 시켰다. 이때 큰아버지도 잡혀갔다. 아버지도 정치사범이라는 이유로 일을 하지 못해 우리 7남매가 정말 힘들게 살았다. 게다가 아버지는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여 장애를 얻었지만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정치사범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민사소송도 진행했지만 재판부는 아버지에게 잘 못한 것이 없다고 답했다. 4.3이라는 것이 참 나쁘다. 4.3 때문에 아홉 식구가 돌아가셨다. 만약 정치사범이 문제라면 애초에 한국전 참전도 시키지 말았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큰아버지의 무죄를 선고해줘서 고맙다.
제주다크투어 방청 채록

20명의 망인이 된 피고인에게 무죄를 주문한 판사는 재판을 마치며 "오늘 재판을 진행하며 유족의 삶은 부모님과 가족이 안 계신 사정으로 진짜 힘든 삶을 살아오셨겠구나 생각을 했다. 오늘 판결을 통해 힘든 것들이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관련기사] 죽은 피고인 20명에게 무죄, 남은 가족 기구한 삶

오마이뉴스, 김잔디

[관련기사] 제주 80대 노인의 증언 “시체더미 속에서 아버지 시신 찾던 어머니”

제주의 소리, 이동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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