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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9일 오전 10시,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는 4・3관련 일반재판 수형인 30명에 대한 직권재심 재판(사건번호 2024재고합19)이 열렸다. 피고인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죄 등으로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가 대부분이 행방불명되었다. 더욱이 이들은 적법한 절차 없이 잡혀갔으며 공소사실에 대한 충분한 조사나 검증 없이 형량을 채워야 했다. 이에 재판부는 피고인 30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오늘 법정에서 문성윤 변호인은 피고인들의 공소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은 검사에게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밝히며 최종 변론을 시작했다.
"피고인들은 재판을 받을 만한 잘못을 한 적이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중략) 피고인들에 대한 4·3희생자 신고서를 보면, 피고인들은 무단으로 영장 없이 경찰에 의해 불법으로 끌려갔음을 알 수 있다. 집에서 잠을 자다가 끌려가거나, 소개령에 따라 잠시 몸을 피했다가, 자수하면 살라준다는 말을 듣고 내려왔다가 끌려가는 식으로 영장도 없이 불법으로 모두 체포되었다.
또한 실제적인 내용을 보더라도 이 사건 재심청구서 등에 비춰보면, 실제로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이 공소사실과 같은 잘못을 하였는지 여부에 대한 치밀한 심의도 없었고, 체포 과정의 불법성 여부에 대한 논의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단순 가담자에 대해서도 일률적으로 실형 청구를 하였다는 것이 알 수 있다. 이 사건 공소장과 신고서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피고인들이 공소사실과 같은 내용의 현장에서 체포된 경우는 단 한 분도 없었다.
이 사건 피고인들은 불법으로 연행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다가 상당수의 피고인들은 행발불명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피고인들은 부모와 형제, 어린 자식을 생각하며 억울하게 숨을 거두었다.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그 피고인들의 한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 사건 피고인의 유족들은 부디 이번 재심에서 피고인들의 명예가 회복되어 그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기를 간곡히 기대하고 있다. (중략) 다시는 우리 역사에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해줄 것을 바란다."


이어서 피고인들의 유족이 밝힌 진술을 소개한다.

망 김영필의 동생 김00씨는 “나는 막내동생이다. 형과 22살 차이가 나고, 6.25 전쟁 이후에 내가 태어났다. 말로만 형이 있다는 얘기만 들었지, 얼굴도 모르고 이름밖에 모른다. 아버지가 한평생 한숨만 쉬다가 돌아가신 것을 이제 피부로 느꼈다. 그 한숨이 형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45세에 내가 태어났고 내가 성인이 되니 아버지는 노인이었다. 아버지가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지 못한 것이 떠오른다.”라며 쏟아지는 울음에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망 김태하는 1949년 8월 제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죄, 법령 제19호 위반죄, 내란방조죄로 징역 2년에 처하는 유죄판결을 선고받았다. 그의 공소사실은 남로당 가입, 불온 삐라 살포, 연락문서·군자금·지령문서 전달 등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검찰은 70년 전에도, 지금도 이 모든 공소사실에 대해 증명력 있는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또한 70년 전 불법적인 재판절차를 거쳐 그가 지은 적 없는 죄의 형벌을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날 재판에는 그의 딸과 사위가 참석하였고, 그의 사위 이00씨가 진술하였다.
“옛날 22, 23살이 뭘 알았겠나, 남로당이니 반란이니 생각했겠는가.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났다 생각해보라. 이게 2, 3년 형이 나올 일이겠는가? 무식한 사람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재판을 한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재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정말 기가 막힌 일이다.”

망 양인하는 1949년 9월 제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과 내란방조죄 위반으로 금고 2년 형을 선고받았다. 기록되어 있는 그의 공소사실은 남로당 가입, 폭도에게 식량·당비·우마를 전달 및 제공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소사실은 명확한 증거가 없고, 이를 확인하는 법적절차가 없었다는 것이 이번 재심재판에서 밝혀져 명예회복되었다. 그의 손자 양00은 망 양인하뿐 아니라 4·3시기 일가족의 희생이 컸다고 한다. 그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희 집안에는 4·3.사건으로해서 육촌까지 8명이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광주형무소로 갔는데, 할아버지는 돌아오자마자 돌아가시고, 작은아버지는 행방불명이다. 제가 6세 때다. 말이 안 나온다. 고향 초가집에 (토벌대가) 불을 지르니 옹포에 있는 수용소에 살았다. 그렇게 살아왔고,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삼촌, 오촌 다 돌아가셨다. 이럴 수 있는가? 말로 다 못하겠다. 기가 막힌다. 오늘 법원에도 아침에 울면서 왔다. 판사님이 잘 판단해달라.”

망 양원곤은 1949년 9월 제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방조죄로 금고 2년을 선고받았다. 그의 공소사실은 남로당 가입, 폭도에게 식량 운반 및 제공 협의를 받았다. 그러나 과거의 재판기록에서 이를 증명할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고, 그는 이번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에는 그의 양손자 양00이 참석하여 아래와 같이 진술하였다.
“어릴 적에 이런 기억이 있다. 아버지 생가가 있는데, 생가에 친아버지 가족들과 같이 지내다가 아버지가 다른 집안에 양자로 가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어떤 이유로 아버지가 양자로 가는지 몰랐다. 나중에 성장하며 찾아보니 할아버지가 4·3때 성을 쌓다가 아무런 이유 없이 경찰에 의해 끌려가서 행방불명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단순 행방불명으로만 알고 있었다. 법정에 재판을 받았는지도 몰랐다. 저처럼 젊은 유족들도 이런 구체적인 내용들을 알 수 있도록 전해졌으면 좋겠다.
지금 돌아가신 저희 할아버지는 유해도 찾지도 못했고, 사망신고도 못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생존 여부를 모르는데, 어떻게 사망신고를 하겠는가.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4·3.사건 명예회복과 보상 등 변화에 그냥 따라가는 상황이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어떤 과정으로 (행방불명된 것인지) 저라도 알아야 후속 과정을 할 수 있는데, 행안부는 보증서류를 만들어서 제출하라고 재촉만 한다. 재판과정을 보면, 그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본 피해 내용이 다 나와 있다. 그런데도 유족과 친지에게 옛날의 아픔을 회상시키면서까지 증명서류를 내라는 것은 맞지 않다. 여기 계신 유족들이 앞으로는 아픔 없이 지내도록 국가 차원에서, 행정차원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처리해주길 바란다.”


망 한원경은 1949년 8월 제주지방법원에서 내란방조죄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그의 공소내용은 폭도에게 연락하는 빗개 역할을 했으며, 도로 차단, 시위행령 참여 등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증거가 없고,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불법적으로 형벌을 내린 것으로 이번 재심에서 밝혀졌다. 그녀의 손녀 한00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와 힘겹게 살아온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진술했다.
“하늘에 계신 저희 할아버지께서 이 목소리를 들었으면 한다.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꽤 되었다. 생전에 할아버지에 대한 말씀이 없었다. 아버지가 고아로만 살면서 힘든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할아버지가 추후에 4·3 희생자로 등록이 되었다고 들었다. 최근에 할아버지가 재판을 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깜짝 놀랐다. 왜 할아버지가 재판을 다시 받아야 하는 위치에 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부분 강제로 끌려가 재판을 받았다고 들었다. 4·3 당시 저희 할머니께서 아프셨다. 조천 어딘가에서 치료 중이었는데, 할아버지가 그곳에 가던 중에 행방불명되었다고 들었다. 당시에 아버지가 4살, 할아버지는 30대 목수로 일하셨다고 들었다. 아픈 아내와 어린 아들 하나를 돌보는 상황에서 그런 내란을 했다는 것도 말도 안 되고, 그 상황에서 절차 없이 끌려고 재판받아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우리 아빠는 고아가 되어 부모 없는 삶을 사셔야 했다. 아버지가 이런 고통을 안고 살다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죄인이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다는 것에 손녀로서 한이 맺혔다. 이 재판을 통해 그 무고가 드러나길 원하고. 죄가 없음이 판결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기다렸을 것 같다. 민주주의 국가로서 후세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4·3희생자이자 망인이 된 30명의 피고인에게 방선옥 부장판사 “오늘도 30명의 피고인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매번 재판을 할때마다 저희들도 이 사건 기록도 읽어보고 피고인들의 아픔을 경험하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유족들은 가족이 없다는 것과 여러 가지 사회적이 제약 속에서 살아가면서 고생이 많았겠다는 것에 항상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이렇게 무죄판결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재판의 소감을 남겼다.

[관련기사] 억겁같은 슬픔 견딘 제주4.3 유족들 “대한민국에서 다시는”

제주의소리, 이동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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