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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6일 제주 MBC 라디오 제주시대 '오늘의 시선'에 백가윤 대표가 출연해 <일본 오키나와의 다크투어 유적지와 조선인 유해발굴을 통한 동아시아 평화의 의미>를 주제로 대담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제주다크투어 백가윤 대표가 제주 MBC 라디오 제주시대 '오늘의 시선' 코너에 출연해 다양한 이야기로 도민들을 찾아갑니다. 2월 26일 방송에서는 <일본 오키나와의 다크투어 유적지와 조선인 유해발굴을 통한 동아시아 평화의 의미>를 주제로 대담했습니다.

[대담 내용]

윤 : 매주 수요일 이 시간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눈으로 제주의 가치를 더하는 <오늘의 시선>으로 찾아옵니다. 오늘은 제주다크투어 백가윤 대표와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백 : 안녕하세요. 한 달 만에 다시 인사드립니다.

윤 : 오늘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 오셨나요?

백 : 저번 방송 이후 오키나와에 5박 6일 정도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늘 방송에서는 오키나와에 있는 다양한 다크투어 유적지들을 소개하고 또 방문 기간 동안 함께했던 조선인 유해발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보려고 합니다.

윤 : 오키나와까지 멀리 다녀오셨네요. 어떤 계기로 가시게 된건가요?

백 : 저희가 처음 단체를 만들 때, 제주 뿐만이 아니라 육지의 다크투어 현장들 그리고 동아시아 다크투어의 현장들과 연대하여 활동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희 단체 슬로건이 시민의 힘으로 지키는 제주의 역사와 동아시아의 평화거든요. 그 일환으로 올해 하반기에 오키나와 다크투어 프로그램을 기혹하기 위해 사전 답사 차원으로 다녀왔습니다. 다행히 코로나 19가 확산되기 전에 다녀왔어요.

윤 : 아 그렇군요, 오키나와의 역사, 제주와 비슷한 아픔을 갖고 있기도 한데요. 오키나와의 다크투어 유적지 먼저 소개해 주시죠. 어디를 직접 찾아보신 건가요?

백 : 이번에는 유해발굴까지 함께 하고 돌아오는 일정이라 많은 곳들을 가보지는 못하고 꼭 방문해야 하는 곳들 위주로 다녀왔습니다. 제주4.3 평화공원 같은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오키나와 전 당시 사람들이 숨어있었던 동굴, 사키마 미술관, 강제동원됐던 조선인들을 기리는 한의비, 헤노코 기지 반대 현장 등을 다녀왔습니다.

윤 : 그 때 당시에 오키나와에도 사람들이 숨어살았던 동굴이 있었다고요? 제주와 비슷하네요.


백 : 네 그렇습니다. 일본어로 동굴을 “가마”라고 하는데요. 오키나와에는 같은 동굴이지만 두 개의 다른 운명을 가진 치비치리 가마와 시무쿠 가마가 있습니다. 요미탄촌이라고 하는 같은 마을 주민들이 두 개의 가마에 나눠서 숨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치비치리 가마에서는 85명의 희생자가 나온 반면 시무쿠 가마에서는 천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윤 :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나요? 먼저 희생자가 나온 치비치리 가마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백 : 오키나와에서는 1945년 4월 1일에 지상전이 시작되고 당시 요미탄촌 해안에 미군이 상륙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지역 주민 약 140여 명이 치비치리 가마에 숨어 있었는데요. 당시 오키나와 사람들은 미군들이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나 짐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본토에서 온 군인들이 그렇게 세뇌시켰기 때문이었죠. 미군에게 잡히면 남자들의 눈을 뽑고 귀를 자르고 코를 잘라 비참하게 죽이고 여자들은 더 비참하게 죽인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미군들이 굴 밖에서 죽이지 않을테니 나오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 공포를 없앨 수 없었습니다.
치비치리 가마에는 당시 25살이었던 간호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이 간호사는 일전에 난징 대학살 때 일본군 간호사로 같이 가 그 참혹한 현장을 다 목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간호사가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중국에서 보았는데, 일본군들이 중국인들에게 말로 다 하지 못할 일을 했어요. 미군이 오면 또 똑같이 할 거예요. 그렇게 끔찍하게 고통받고 죽느니 지금 그냥 우리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18살 하루 상이 어머니께 미군에게 잡혀서 죽느니 그냥 어머니 손에 죽고 싶다고 간청하기 시작했습니다. 망설이던 어머니가 결국 들고 있던 칼로 딸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걸 시작으로 동굴에 숨어있던 가족들이 칼이나 낫으로 서로를 죽이고, 자결하고, 불태우고, 질식시켰다고 합니다. 일본 본토 사람들은 오키나와 집단 자결이라고 이를 표현하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강제 집단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끔찍한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5명. 비참한 사건이라 이후에도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시 되었습니다.

윤 : 정말 끔찍한 이야기네요. 4.3과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 금기시 되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나요?

백 : 오키나와에는 죽은 지 33년이 지나면 천당에 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지 33년 후, 마을 청년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본토에서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당시 천황과 국가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 하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단호히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일본에 의한 세뇌, 잘못된 교육이 빚어낸 끔찍한 결과입니다. 실제 저희 동굴 안내를 맡아주신 마을 주민 치바나 쇼이치 선생님은 아주 초기에 동굴 조사에 참여하셨던 분인데요. 지금은 일반인들의 동굴 출입은 금하고 있지만 선생님 덕분에 안쪽까지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제주와는 다르게 그 안에는 당시 살해된 사람들의 뼈조각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저희도 돌아가신 분들을 위로하며 제주에서 가져간 소주 한 잔을 올리고 돌아왔습니다.

윤 : 그렇다면 다른 동굴인 시무쿠 가마에서는 어떻게 사람들이 다 살아남을 수 있었나요?

백 : 시무쿠가마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 동굴에는 약 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숨어있었지요. 시무쿠가마는 길이가 약 2,600미터나 되고 오키나와에서 두 번째로 큰 동굴입니다. 이 동굴 안에 숨어있던 사람들 중에는 예전에 하와이에서 노동자로 일을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두 명 있었습니다. 숨어있던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실제 미군들을 만나본 적이 있는 이 두 사람이 동굴 안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미군들은 귀신이 아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미군들이 동굴 앞에 도착해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말하자 영어를 할 수 있었던 이 사람들이 밖에 나가 "이 동굴에는 군인이 없다. 우리는 모두 민간인들이다."라고 설명하고 그 결과, 시무쿠가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일어난 두 개의 다른 운명을 이 두 동굴 이야기에서 극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윤 : 그렇군요. 사키마 미술관도 다녀오셨다고요. 제주 4.3과 관련해서는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지다>가 대표적인 미술작품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요. 사키마 미술관도 오키나와의 아픔을 다룬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면서요?

백 : 네 그렇습니다. 사키마 미술관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마루키 이리, 마루키 토시 부부가 작업한 오키나와전도(Battle of Okinawa)라는 작품인데요. 미술관 제일 안쪽 큰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어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크기도 크기이지만 이 그림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큰데요. 전쟁 때의 끔찍한 현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절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가 그 기억을 놓지 않고 마음에 되새기며 평화를 위한 길을 걸어야 한다, 저희가 만났던 오키나와 사람들이 당부한 말입니다.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도 오키나와전도 그림은 한 번쯤 꼭 찾아보시면 좋겠어요.

윤 : 사키마 미술관 자체도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이라고 들었는데요?

백 : 맞습니다. 사키마 미술관 부지는 사키마 집안이 대대로 소유한 곳인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이 점령해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지라고 불리는 후텐마 기지의 일부가 됐습니다. 빼앗겼던 땅을 일부 돌려받아 그 자리에 사키마 미술관이 세워졌어요. 저희는 운이 좋게도 사키마 미술관 관장님의 안내를 받아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는데요. 관장님께서는 제주4.3과 관련한 활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만나서 반갑다며 앞으로 함께 연대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나가면 좋겠다고 응원해 주셨습니다.

윤 : 방문하시는 동안 둘러보신 오키나와의 유적지들도 잘 보존이 돼 있던 건가요?

백 : 대표적인 곳들, 오키나와 평화기념관이나 사키마 미술관 등은 지도에서도 찾기 쉽고 안내도 잘 되어있지만 다른 곳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저희는 다행히 일본어가 가능하신 분이 함께 가셔서 통역이나 안내 등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저희가 다녀온 곳들은 구글 지도에 위치와 사진을 함께 기록해 저희 웹사이트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윤 : 다음은 유해발굴 이야기를 해보죠, 제주 4.3도 지난해 유해발굴 사업이나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한 가족찾기 등 사업이 진행되고 있긴 합니다. 오키나와에서도 이 같은 유해발굴이 있었던 것인가요?

백 : 네. 이번 유해발굴은 1945년 미국 잡지 라이프지에 실린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되었는데요. 저 멀리 세소코 섬이 보이는 사진에 14명의 묘표, 그러니까 묘비와 미군 병사가 찍힌 사진입니다. 그리고 그 묘표에는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 김만두씨와 명장모씨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오키나와 전에 강제로 끌려오신 분들이겠죠. 이 사진과 증언을 바탕으로 유골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 이번 유해발굴을 진행했습니다.

윤 : 그렇군요. 오키나와 전에 희생되었던 조선인들이 많이 있나요?

백 :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3일까지 83일에 걸쳐 일어난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되신 분들은 오키나와 평화기념관에 기록되어 있는 수만 해도 241,566명에 달합니다. 그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은 82명, 대한민국 출신은 382명입니다. 일본 땅에 끌려왔을 때는 ‘조선’이라는 한 나라 국민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이름 아래 기억되고 있습니다.
사진에 나온 장소에 묻히신 분들은 오키나와 지상전이 일어나기 전인 1945년 2월 11일, 모토부정 도구치항에 정박해 있던 히코산마루가 미군의 공격으로 불타면서 희생된 분들로 보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7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던 유골을 발굴해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작업이 시작된 것이지요.

윤 : 어떤 사람들이 유해발굴에 참여했습니까?

백 : 이번 유해발굴은 모토부정 켄켄의 유골을 고향에 돌려보내는 모임, (사)평화디딤돌, NPO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 동아시아공동워크샵 실행위원회 등 일본, 대만, 한국의 청년들이 모여 함께 진행했습니다. 유해를 찾는 작업을 동아시아 삼국의 청년들이 힘을 모아 함께 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었습니다.

윤 : 오키나와 유해발굴 현장은 결국 일본 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대만 등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군요. 대표님은 가서 유해발굴 어떤 부분에 참여하셨습니까? 실제로 유해발굴을 해보니 어떠셨나요?

백 : 저도 유해발굴에 참여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요. 책에서는 붓으로 뼈를 털어내던 사진만 보았는데 실제 유해발굴에 참가해보니 육체노동의 강도가 만만치 않더라고요. 구부정한 허리를 펼 시간도 없이 땅을 파고 양동이에 흙을 담아 나르면서 유해를 찾았습니다. 실제 해보니 그 동안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및 강제동원 된 조선인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해 왔던 동료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더라고요.

윤 : 오키나와 현지 언론에서도 이번 유해발굴 소식을 비중있게 다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유해를 찾을 수 있었나요?

백 : 그랬으면 참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 유해는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동물뼈로 보이는 뼈, 기관총 탄두, 1970년~1980년대 맥주캔 등이 발견되었고 사람의 등뼈로 보이는 뼈도 3점 발견되었지만 당시 돌아가신 분의 뼈인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저희가 떠나온 후 동굴로 추정되는 곳을 드론으로 찾아내 소형 카메라를 넣어 촬영해 보니 팔뼈로도 보일 수 있는 나뭇가지 모양의 물체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유해발굴이라는 것은 기간을 정해 그 기간 동안 추정된 장소를 발굴해야 하는 작업으로 기한 없이 발굴을 진행할 수 없어 이번 발굴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후 뼈를 감식하는 작업, 유해발굴을 재개하는 여부 등은 추후 논의를 통해 결정될 것 같습니다.

윤 : 유해가 발굴되지 않았다니 안타깝네요. 이번 발굴이 결국은 정부 차원에서 이뤄지 것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이뤄진 것인데 앞으로의 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백 : 유해발굴이라는 것은 현장에서의 발굴 작업 뿐만이 아니라 그 전후의 모든 과정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어려운 일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오래전 돌아가신 분의 유해를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렇게 찾은 유골을 어떻게 가족에게 돌려보낼 것인가, 가족이 받기를 거부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등 다양한 고민거리를 안고 돌아왔는데요. 시민을 지켜주지 않았던 군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유해를 찾는 일에 국가는 나몰라라 하고, 시민들이 나서서 유해를 발굴해야 하는 현실이 75년 전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에 오키나와에 다녀오면서 국가가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시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대체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묻게 됩니다. 군대로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오키나와는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주4.3을 기억하며 시민의 힘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켜나가고자 하는 저희의 지향점을 오키나와 시민들이, 그리고 이번 유해발굴에 함께한 동아시아의 청년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도 동아시아 시민들의 연대로 만들어가는 평화에 함께 하겠습니다.

윤 : 네 잘 들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지금까지 제주다크투어 백가윤 대표와 함께 했습니다.

백 :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주MBC 라디오제주시대

제주MBC 라디오제주시대 <오늘의 시선> 대담내용은 제주MBC홈페이지에서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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