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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MBC 라디오 제주시대, 격주 화요일 18:05 만나는 <드라마틱한 제주이야기>에 제주다크투어 대표가 출연합니다.
제주MBC 라디오 제주시대, 격주 화요일 18:05 만나는 <드라마틱한 제주이야기>에 제주다크투어 대표가 출연합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4월 28일부터 격주 화요일 18시 5분 제주MBC ‘라디오 제주시대’를 통해 제주4·3 역사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드라마틱한 제주이야기>에서 유명 관광지, 소설이나 영화를 중심으로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4·3 역사를 소개합니다. 4·3역사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 <제주4·3유적>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격주 화요일 18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7.9MHz, 서귀포 97.1MHz에서 만나요!

오늘은 5·10 선거 관련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제주에서 5.10 선거는 ‘분단의 저항’과 ‘비극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제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당시 5.10선거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인식되면서 한반도가 분단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남로당을 중심으로 이러한 우려를 강력히 제기하며, 5.10선거 반대가 중요한 정치 슬로건이 됩니다.

Q. 5·10 선거가 치러지게 된 배경부터 들어볼까요?
A. 1945년 광복 이후 한반도에 정부를 세우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협의했으나, 여러번의 회담에도 이견을 좁히지 못했습니다. 결국 1947년 최종 결렬되면서 9월 17일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습니다. 유엔 총회는 1947년 11월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을 설치하고, 이들의 감시 하에‘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고 선거는 보통선거원칙과 비밀투표에 의해 치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후 선거 결과에 따라 조속히 국회를 구성하여 정부를 수립하기로 합니다. 이 결의는 소련의 협조 없이는 사실상 실현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북한 지역을 점령 중이던 소련은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하고 유엔 소총회에서 1948년 2월 ‘유엔의 접근이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기로 최종 결정했습니다.

Q. 소련은 왜 유엔의 결정을 반대한 건가요?
A. 소련은 앞선 미국과의 협정에 위반한다는 지적과 함께 한반도 문제의 유엔 상정 자체를 반대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선(先) 정부 수립, 후(後) 외군 철수’를 주장했으나 소련은 ‘선 외군 철수, 후 정부 수립’을 내세웠습니다. 또한 소련은 유엔 논의 과정에 대한 남․북 대표들의 동시 초청을 우선적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기계적 다수’가 확보되면서 소련의 의견은 고립되었고, 이러한 미국 주도의 해결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인구 비례로 선거를 치를 경우 당시 남한의 인구가 북한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남한 200석, 북한 100석으로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주의 세력이 권력을 잡기 매우 불리한 구조였습니다. 결국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가 미국과 남한 우파진영의 승리이며, 소련에게는 비우호적 정부의 수립을 가져올 것이라는 계산에 따라 반대하게 된 것입니다.

Q. 유엔 내에는 소련 외에 반대입장이 없었나요? 그래도 최종적으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진행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A. 1948년 1월 초부터 서울에 온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은 소련의 반대로 이북 쪽은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인도 소속 메논 의장이 유엔에 돌아가 유엔총회에 한반동의 동향에 대해 발표하는데요.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문제에 대해 한국인을 반응을 설명하면서 ‘한국에는 다양한 정당이 있는데, 이승만의 독촉국민회와 김성수의 한민당 계열만 이를 지지하고, 우익 진영 김구의 한독당을 포함한 중도.좌파진영 모두 이를 반대한다’고 보고했습니다. 중립적으로 보이죠. 그런데 메논 의장은 이승만을 ‘위대한 애국자’라고 칭송하면서 단독선거를 지지하는 듯한 입장을 드러냅니다. 결국 유엔회의에서는 유엔이 감시 가능한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자는 토론이 이어졌고, 캐나다와 호주 대표는 한반도의 전체 선거를 남한만 국한시켜 하는 것은 유엔총회의 결의에 어긋한다며 반대하였고, 소련과 관련국 포함 11개국이 기권하여 31대 2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1948년 5월 10일로 확정되었습니다.

Q. 5.10 선거가 치러지는 당시 전국의 상황은 어땠나요?
A. 1948년 5월 10일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전국의 상황은 혼란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남한 내의 많은 정당과 단체가 잇라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격렬하게 반발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된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유엔도 인식했듯이 좌파 진영뿐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 반대입장에 가세합니다. 전국적으로 5·10선거 반대자들에 의해 경찰서 및 선거사무소 습격이 줄을 이었습니다. 육지부를 중심으로는 ‘2·7 구국투쟁’등 총파업을 결행하기도 합니다. 미군정의 딘 군정장관은 남한 13,800여 개소의 선거사무소를 35,000 여 명의 경찰력으로는 지켜낼 수 없다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4월 16일 전국에 향보단을 조직해 경찰을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Q. 선거 전에 한반도 분단을 막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죠?
A.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결정되자, 김구와 김규식, 조소앙, 김원봉 등 남측의 민족주의 및 중도파 인사들은 분단을 막기 위해 북측에 회담을 제안했습니다. 이에 북측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등이 정당과 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대규모 회의 형식을 역제안하면서 ‘남북연석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1948년 4월 19일부터 4월 30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의 정치 지도자들이 모여 다음의 4개 항에 합의했습니다.

  1. 미·소 양군이 즉시 동시에 철수할 것.
  2. 외군 철수 후 내전이 발생하지 않을 것임을 확약함.
  3. 전 조선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4. 남한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

그러나 이는 성사되지 않습니다.

Q. 그 이유가 뭔가요?
A. 당시 남북한은 이미 각자의 체제 수립 과정을 밟고 있어서 실질적인 단독 정부 수립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이미 헌법 초안을 마련한 상태여서 이 회의를 자신들의 정권 수립에 대한 정당성 확보와 프로파간다(선전)로 이용했다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결국 5월 10일 남한만의 선거가 치러지게 됩니다.

Q. 선거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A. 총 유권자의 95.5%가 참여하여 매우 높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제헌의원 200석 중 제주도 2개 선거구가 무효 처리 되면서 198명이 먼저 선출됩니다. 1948년 5월 31일 첫 국회가 열렸고,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 김동원이 선출되었습니다. 이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여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Q. 제주도 2개 선거구는 왜 무효 처리가 된 거죠?
A. 제주도에는 북제주군 갑, 을과 남제주군 이렇게 3개의 선거구가 있었는데요. 3개 선거구 총 유권자 85,649명 중 53,698명이 투표해 62.8%로 가장 낮은 투표율을 나타냈습니다. 남제주군 선거구는 86.6%의 투표율로 무소속 오용국이 당선되었구요. 북제주군 갑, 을 2개 선거구에서 투표율이 과반수에 미달하여 선거 자체가 무효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원래 제헌의원 정원 200명에서 제주 몫 2명이 빠진 198명으로 시작하게 된 거죠.

Q. 제주도만 왜 투표율이 낮았던 거죠?
A.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로당 제주도당과 도민들은 “단선·단정 반대”를 내걸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킨 무장대도 단선.단정 반대가 주요 슬로건이었습니다.
제주도민은 그동안 쌓여있던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있었습니다. 미군정이 제주도에 외지 출신 경찰과 극우 단체인 서북청년단을 대거 투입했고, 이들의 고문과 약탈, 폭력적인 행태는 주민들이 미군정이 주도하는 선거 자체를 거부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Q. 5.10 선거 때 미군정의 상황은?
A. 4·3발발 이후 5월 5일에 이르기까지 한 달간은 제주사태가 유혈로 가느냐, 아니면 화평으로 끝나는냐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뤘던 4.28 평화협정이 무산되면서 미군정 당국은 끝내 무력에 의한 진압정책 카드를 선택하게 되었죠.
당시 미군정은 선거를 앞두고 △9연대장 교체 △국방경비대 병력 증강 △응원경찰 파견 △군정 수뇌부 현지 시찰 등의 대책을 세웠습니다. 4·3발발 직후 군정 당국이 밝힌 무장세력은 500명 안팎이었는데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정 당국은 1,700명의 응원경찰, 500명의 서청 단원들을 본토에서 제주섬에 배치합니다. 또한 현지 9연대 이외에 부산의 5연대 1개 대대, 수원의 11연대 1개 대대를 추가 파병하였습니다. 사태를 물리적으로 진압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 최종 선거인 등록 결과 64.9%로 전국 평균 91.7%에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선거 당일, 미국이 선거에 개입한다는 인상을 피하려고 미군들에게 투표소 출입을 금기시켰습니다. 그러나 선거가 워낙 중요했기 때문에 투표함 수송현황을 점검했어요. 조천면에서는 실적이 부진한 것을 확인하고 분노하여 조천면장을 연행하기도 했습니다. 안덕면에서는 미군이 직접 광평리로 가서 선거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Q. 5.10 선거에 대해 무장대도 대응을 했나요?
A. 5.10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가장 격렬하게 충돌한 곳이 바로 제주도였습니다. 무장대를 중심으로 선거관리소를 습격하고 선거인명부 등을 탈취했고 선거관리위원들이 피살당하기도 했습니다. 4월 18일 도평리 투표서, 4월 19일 신촌리 투표소가 피습당했습니다. 4월 21일과 22일 사이에도 이호, 내도, 동일, 모슬포, 대정 등지에서 선거사무소를 습격하여 선거인 명부을 탈취했습니다. 4월 30일에는 신평리, 5월 1일에는 도평리, 5월 5일에는 화북리의 선거관리위원장이 피살되었습니다. 이처럼 피습과 습격이 계속 되자, 중산간에 있는 선거 관계자들이 해안마을로 피난할 정도였어요. 아니면, 선관위원을 사퇴하기도 했습니다.

Q. 주민들은 어땠나요?
A. 많은 주민들이 선거를 피해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5월 5일부터 한라산에 올랐다고 합니다. 마을 인근의 오름이나 숲으로 가서 머물다 선거가 끝난 후에야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선거 당일 마을에는 경찰 가족이나 대동청년단 간부, 선거관리위원 등 극소수의 사람들의 제외하고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대리투표가 진행되기도 했는데요. 상천리에서는 선거날 이장 서기 등 3명이 모여 100여 명의 유권자가 특정후보에게 투표한 것처럼 꾸미기도 했습니다. 유엔임시위원단도 제주뿐 아니라 전국적 선거법 위반사례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여 5.10선거 결과를 유보했다가 나중에 유효하다고 인정했습니다.

Q. 이후 제주도 정세는 어떻게 변하였는지요?
A. 미군정과 이후 수립된 이승만 정부는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로 규정하며 강력하게 진압해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됩니다. 이는 이후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초토화 작전이 전개됩니다. 제주도의 무효화된 선거구는 한해 뒤인 1949년 5월 10일에 재선거를 실시하여 북제주군 갑구에 홍순녕, 을구에는 양병직이 당선되었습니다.

Q. 유일하게 5.10선거를 거부한 제주의 역사, 어떻게 기억되어야 합니까?
A. 5.10 선거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정통성의 기반으로서 제주 4·3이 단순한 소요 사태를 거대한 비극으로 치닫게 된 계기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제주의 한반도 통일독립 정부 수립을 불가능하게 했던 사건이기도 합니다. 즉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공로가 있으면서도 민족분단의 책임이 있는 역사인 것입니다. 이는 6.25 전쟁이라는 예측된 유혈의 비극까지 연결됩니다.
유엔이 한반도가 38선을 나뉘는 결정을 할 때, 팔레스타인 또한 강대국의 석유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제대로 된 독립의 기회를 박탈당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80년 가까이 휴전과 분단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무력에 의한 학살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제주도의 5.10단독선거 거부는 분단을 막기 위한 한반도 내의 여러 저항에도 오직 제주도만이 끝까지 통일독립정부 수립을 위해 강대국의 횡포에 저항한, 기념해야할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이 저항은 단순히 특정 정당의 강압으로 이루어진게 아닙니다. 분단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비극이 될지 앞서 내다본 많은 제주도 민중들의 우려와 바람이 담긴 저항이었다고 자부할 만 합니다. 깨어 있던 제주민중의 승리의 날, 축배를 들 날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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