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 건가요?
A. 오늘은 4·3 당시 토벌대와 무장대에 의해 폐허가 되어 원주민이 살지 않게 돼버린 ‘잃어버린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대부분이 중산간에 있는 마을로 주로 초토화 작전 때 해안가 마을로 소개되었다가 복귀하지 못해 과수원이나 밭으로 개간되었습니다. 조사 초기에는 80여 개의 잃어버린 마을이 조사되었는데, 현재 진행 중인 추가 진상조사에는 150여 개까지 더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Q. 원주민분들이 4·3시기가 끝나고도 살던 마을로 돌아가지 못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A.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는데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첫째, 중산간지대가 ‘공비출몰 지역’이라 여겨져 자주 소개대상이 되었고, 그만큼 사망자가 많아 마을을 복원할 원주민이 많지 않았습니다.
둘째, 사건 과정에서 마을 내부에서 집단적으로 희생된 흔적이 남아 있어 복귀가 쉽지 않았습니다.
(복구과정에서 6·25 피난민들이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복귀하지 않고 새로운 중산간지대 주민으로 자리잡기도 했답니다.)
Q. 제주다크투어에서 자주 찾는 ‘잃어버린 마을’은 어떤 곳들이 있나요?
A. 중산간을 대표해서는 조천 와산리의 ‘종남마을’, 구좌 세화리의 ‘다랑쉬마을’, 표선 가시리의 ‘새가름’, ‘종서물’, 서귀 영남리의 ‘영남동’, 안덕 동광리의 ‘무등이왓’, 애월 봉성리의 ‘자리왓’ 등입니다. 특이하게 해안마을에서는 화북의 ‘곤을(흘)동’이 대표적이구요.
Q. 정말 제주 전역에 퍼져있군요. 대표적인 몇 곳 소개해주시겠어요?
A. ‘무등이왓’은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 있는 마을입니다. <제주4·3연구소>에 따르면, ‘무등이왓’은 약 300년 전에 관의 침탈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화전을 일궈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요. 주로 조, 메밀, 콩 등을 재배했고, 교육열이 높아 일본 강점기에는 광신사숙과 2년제 동광간이학교가 있어 주변지역 아이들까지 취학했다고 합니다.
무등이왓은 동광리 마을 중에서도 몰방애가 4곳이 있었고, 4·3 직전까지는 130여 가호가 살았던 매우 큰 마을인데요.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전소되어 마을공동체가 파괴되고, 진취적 기상마저 사라져 폐허가 됐습니다.
- <제주4·3유적지 서귀포시편>, 4·3연구소, 2020, 426-427쪽
Q. 무등이왓은 정말 많은 사람이 살던 마을이네요. 규모가 컸던 만큼 그 피해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A.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에 따르면, 동광리는 중산간 마을임에도 오래도록 소개령이 없다가, 1948년 11월 15일 새벽 이 비극은 시작됩니다. 이날 동광리를 포위한 군 토벌대가 연설을 하겠다며 무등이왓 주민집 우영에 주민들을 집결시켰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미 피해버린 터라 노약자들만이 모였는데요. 토벌대는 주민들이 집결하자마자 다짜고짜 구타를 하다 주민 10여명을 총살했습니다. 관련하여 당시 무등이왓 주민이었던 고군욱씨의 아들 고두언씨의 증언이 남아 있어 소개합니다.
나는 사건 전날인 11월 14일에 사촌과 함께 피신했습니다. 토벌이 심해질 때라 아버지는 ‘난 병환 중이니 너라도 피하라’며 쓰시던 방한모를 주셨지요. 인근 ‘ᄀᆞᆯ른오름(竝岳)’ 부근으로 갔는데 그곳엔 9연대 탈영병도 두 명이 있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병악 꼭대기에 올라 주변을 살피는데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는 모습이 보이더니 곧 비명소리와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날 강군봉씨는 ‘내 아들이 경찰이다’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경찰의 부친인 임아무개는 순간을 틈타 도망쳐 살았습니다. 아버지(고군욱)는 병중이었지만 ‘애국반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나갔다가 희생됐습니다. 그런데 조부와 백부는 ‘집결하면 죽으니까 집에서 나오지 마라’고 귀띔한 좋은 군인 덕분에 무사했습니다. 그런데 사흘 후 강군봉씨의 가족들은 마침 마을에 나타난 산사람을 붙잡아 ‘결과적으로 너희들 때문에 군인들에게 희생된 것’이라며 결박시켜 놓고는 지서에 신고하러 갔습니다. 그러자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산사람들이 강군봉씨의 부친을 살해했습니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⑤, 전예원, 1998, 251-252쪽
Q. 노약자들을요? 젊은이들은 어떻게 먼저 몸을 피한 건가요?
A. <제주4·3연구소>에 따르면, 동광리에는 1947년 8월 8일 유해진 제주도지사가 강하게 밀어붙이던 강제곡물수집정책에 반대해 무력충돌을 빚은 일이 있었습니다. 동광주민 50여 명이 공무원들을 상대로 보리공출 마을할당량을 조정해줄 것을 요구하다가 언쟁 끝에 공무원 3명을 집단구타했고, 이 사건으로 마을 청년 3명이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이후 미군정의 주시하에 수시로 경찰이 들락거렸고, 청년들은 숨기에 바빴다고 합니다.
Q. 무등이왓 주민들은 소개령을 알지 못하고 있었나 봅니다.
A. 맞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에 불을 놓고 한 거죠. 소개자와 비소개자의 구별이 없이 일방적인 폭력을 당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끝없이 도망치는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해안마을로 소개해 가도 ‘도피자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총살당하기 일쑤였으니 희생에 있어서 소개 여부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볼 수도 있어요. 결국 무등이왓은 11월 21일 모두 불타버린 후, 지금까지도 외지인 1분의 농막외에는 밭으로 남아 있습니다.
Q. 그러면 지금은 무등이왓에 예전의 마을이나 집터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나요?
A. 집터 대부분이 밭이나 과수원으로 바뀌었지만, 지금도 마을의 전체적인 형태가 잘 남아 있는 곳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밭담과 밭 사이에 풍성한 대나무숲이 형성되어 있는데요. 이 대숲이 대표적인 잃어버린 마을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Q. 예전에는 마을이나 집들이 얇은 대나무를 심었다고 했죠. 그래서 집은 불타 없어져도 생명력이 강한 이 대숲이 남아, 예전에 마을과 집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했던 것 같아요.
A. 맞습니다. 생필품 수급이 어려웠던 제주에서는 간단한 생활도구를 만들기 위해서 집근처에 대나무를 심어 활용했다고 합니다. 다시 무등이왓으로 돌아가서, 2015년 10월 31일 제주도가 동광리 4·3길을 개통하면서 마을 안 주요 지점마다 안내표지판을 잘 설치해 놓았어요. 잃어버린 마을 표석과 표지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광리 복지회관에 연락하시거나 방문하시면 무등이왓 출신 생존자와 함께 마을터를 돌며 생생한 해설을 들을 수 있습니다.
관련하여 제주4·3기념사업위가 2018년에 무등이왓 생존자인 홍춘호 할머니의 증언 채록한 내용 중에 해설활동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열한살 나던 해 산간이나 중산간에 사는 사람들 전부 내려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전혀 몰랐어요. 이장이 말을 안 해주니 알 수가 없었지요. 내려가는 사람도 몇 있었지만 괸당도 없는 사람들은 내려가서 살 방도가 없으니 집만 불태우지 않으면 살겠다고 해서 내려가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어요. 11월 중순 즈음, 토벌대가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냈어요. 아버지는 보리밭에 가셧기 때문에 집에 없었어요. 그래서 살았어요. 그런데 경찰들이 참 이상했어요. 한 부류는 “당장 나와서 집결하라”라고 하고, 한 부류는 “나오지 맙써”라고 하더라구요. 그날 나간 사람들은 10명이었는데, 설명도 없이 갑자기 총을 막 쐈고 한 명은 달리기가 엄청 빠른 사람이라 내달려서 살았어요. 경찰은 그때 마을에서 총소리가 들리니까 걱정이 돼서 달려 나온 사람도 총으로 쐈어요. 그렇게 하루 10명이 죽어 나갔어요. 토벌대가 내려간 후 사람들은 시신을 수습하러 나갔어요. 하시만 너무 무서우니까 가까운 우영팟에 가매장을 했어요. 그리고 얼마 후 집까지 전부 불탔습니다. 낮엔 방앗간이나 숲에 숨어서 지내고 밤엔 불에 타지 않았던 집에서 잤어요. 가끔 토벌대의 눈을 피해 메밀도 추수하고 한밤에 제사도 지내며 한 달 여간을 생활했어요.
작년부터 4·3사건 문화해설사 일을 하고 있어요. 내 나이 여든하나인데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에요. 처음에는 이 아픈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어요. 그때 마을 사람들이 용기를 줬어요.(중략) 쉽진 않았지만 내가 겪은 일이니까 하게 되더라고요. 작년 8월부터 하고 있는데 첫날엔 너무나 힘이 들었어요. 하나하나 짚어갈수록 기억이 생생해지면서 아팠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큰넓궤 근처에는 가지 않았어요. (중략) 무섭고 끔찍해서 생각하기도 싫었어요. 하지만 몇 번 해설을 하고 나니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도 해설이 나를 치유하는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때의 기억을 계속 전하고 싶어요.-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회, <나 고를 말 잇주게>, 2018, 홍춘호 기억의책, 주식회사 꿈틀, 2018, 27-28쪽, 101-102쪽
Q. 다음으로 소개할 곳은요?
A. 조천 와산리 종남마을(종남밭)입니다. 4·3 당시 10호 50여명의 주민들이 농사와 축산을 하며 살아가던 조그마한 자연마을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던 물통 근처에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요. 그 표석의 내용에 의하면, 1948년 11월 20일 토벌대가 마을을 방화함에 따라 일부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소개되어 생활하다가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희생당하기도 하고, 인근 오름 등에 피신했다가 토벌대에 발각되어 총살당했다고 합니다. 이 비극의 와중에 살아남은 주민들은 1949년 대흘국민학교에 집단생활을 하다가 1952년 본동으로 돌아와서 마을을 재건해 살았다고 해요. 종남마을은 그대로 복구가 되지 못한 채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Q. 특별히 이곳을 소개해주신 이유가 있을까요?
A. 현재 마을터 일부가 제주도에 의해 정비되면서 새로 안내판이 세워졌는데요. 그 내용에 따르면, 종남밭은 4·3이 끝나고 김씨 등 일부 주민이 마을로 돌아와 물통 인근에 높은 돌담을 쌓고 주거지를 마련해 생활하다가 10여 년 뒤 모두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흔적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어 잃어버린 마을 중에 집의 형태가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곳으로서 한번 가 볼만한 곳이라 소개를 했습니다.
Q. 4·3 이후에 어렵게 마을로 돌아와 살던 분들의 삶터를 보실 수 있겠네요. 잃어버린 마을 중에 해안가 마을도 있다고 하신 것 같은데, 어떤 곳이 있나요?
A. 네, 바로 곤을(흘)동입니다. 곤을동은 화북천이 바다를 향해 흐르다 별도봉 동쪽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이 하천 제일 안쪽을 안곤을(22호), 두 하천 사이가 가운뎃곤을(17호), 그리고 화북과 이어지는 밧곤을(5호)이라고 부릅니다. 제주 해안마을의 주요 생활 형태인 반농반어로 생계를 꾸리던 이곳 주민들은 1949년 1월 4일, 불시에 들이닥친 토벌대에 의해 마을 전체가 피해를 입게 됩니다.
Q.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 였나요?
A. 총 44호의 가옥이 전소되고 이튿날까지 주민 24명이 학살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한겨레신문이 취재한 당시 13세로 안곤을에 거주했던 김용두씨의 증언이 있는데요.
1949년 1월 4일 낮에 친구들과 '태역밭(풀밭)'에서 공을 차며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총을 쏘며 마을로 들이닥쳤습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한곳으로 다 모이게 하더니,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불이 붙은 초가집 지붕에서 시꺼먼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기르던 소와 돼지들이 우리 안에서 타죽으며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동네에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옷 한 벌 챙기지 못하고 맨몸으로 쫓겨나 화북리 친척 집으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허호준 기자, (2021.04.02) [제주4·3] 핏빛 바다, ‘곤을동’에 가신적이있나요,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area/jeju/989455.html
김용두씨는 이 일로 1월 4일과 5일 양일간에 아버지와 두 살 위의 형님을 잃었습니다.
Q. 토벌대가 해안마을인 곤을동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의 이유가 있을까요?
A. 1999년 8월 13일 자,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에 따르면 이 무렵이 2연대와 9연대의 교체기였고 허술한 틈을 이용해 무장대의 집중 공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1949년 1월 3일에도 무장대가 삼양리를 습격하자 화북지서에서는 민보단을 출동시킵니다. 이때 민보단장이 희생되면서 이튿날 보복성 학살이 있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왜 토벌대가 유독 곤을동을 초토화했는지는 그 이유가 불확실합니다. 이 무렵 무장대가 공격할 때 토벌대의 출동을 더디게 하기 위해 곤을동 주변 일주도로를 차단하거나 경찰차량 습격사건 등이 있었는데 이 때문이 아닐까 짐작할 뿐입니다.
Q. 이곳은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A. 네. 밧곤을과 가운뎃곤을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별도봉과 화북천 사이에 위치한 안곤을은 마을터 대부분의 집담들이 남아있습니다. 마을 올레와 집담, 밧담, ᄆᆞᆯ방앗간 등 안곤을 집터가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이곳도 보존을 위해 제주도가 오랫동안 매입을 추진하고 있는데, 가격협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언제 흔적이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Q. 제주도 전역에 20여 개의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고 하는데요. 잘 관리되고 있나요?
A. 제주도에 사무실이 있는 카카오가 운영하는 카카오맵에는 표석이 세워져 있는 곳을 모두 검색해서 찾아가보실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잘 관리되는 편인데, 가끔 주민들의 민원으로 표석이 옮겨지기도 하고, 습한 곳에 위치해 이끼가 껴 표석의 글이 잘 보이지 않는 곳도 있기는 합니다. 사실 이런 부분 말고도 표석 내용에 대한 개선이 필요한대요.
Q. 어떤 부분일까요?
A.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도 지적하고 있는데요. 일부 표석의 경우, 폐촌 시기 및 경위가 누락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누가 마을을 소개하고 불태웠는지가 언급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 표석들이 주로 2000년대 초에 세워졌는데, 그때까지만해도 마을을 폐촌시킨 행위 주체를 표기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Q.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고, 진상조사나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도 잘 이뤄지고 있으니 표석도 말씀주신대로 개선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4·3의 아픔의 흔적인 ‘잃어버린 마을’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끝으로 이 표현의 대안 표현을 제안하고 싶다고요?
A. 정식 명칭은 ‘잃어버린 마을’이 맞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가졌던 물건이 자신도 모르게 없어져 그것을 아주 갖지 아니하게 되다.’란 뜻이에요. 잃어버린 주체가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고 또 강제로 내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실제 역사적 의미를 더 잘 담아내기 위해 ‘빼앗긴 마을’이란 표현은 어떨지 제안해보고 싶고요.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지 관심 있는 분들은 함께 고민도 해주시고, 제안해주세요.
참고문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2:서귀포시편>, 2020 , 제주:도서출판 각.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말한다 5, 1998, 전예원.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회, <나 고를 말 잇주게> 홍춘호 기억의책, 2018, 주식회사 꿈틀
허호준 기자, (2021.04.02) [제주4·3] 핏빛 바다, ‘곤을동’에 가신적이있나요,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area/jeju/98945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