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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MBC 라디오 제주시대, 격주 화요일 18:05 만나는 <드라마틱한 제주이야기>에 제주다크투어 대표가 출연합니다.
제주MBC 라디오 제주시대, 격주 화요일 18:05 만나는 <드라마틱한 제주이야기>에 제주다크투어 대표가 출연합니다.

Q.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까요?
A. 오늘은 어제가 여순항쟁 78주기라 짧게 ‘여수·순천 10·19사건(여순항쟁)’ 이야기와 남원읍 의귀리에서 있었던 4·3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Q. 네, 그럼 의귀리 이야기는 잠시 뒤에 듣도록 하고, 여순항쟁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죠.
A. 여순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의 진압 파병 명령을 거부하며 봉기한 것을 시작으로, 전남 동부지역의 민중들이 결합하여 국가 폭력에 저항했으나 군경 토벌대의 가혹한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집단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제주 4·3과 비슷하게 여순항쟁의 중요한 과제가 정명(正名), 바로 이름을 바로 찾는 일입니다.여순 반란, 사건, 항쟁.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항쟁의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당시 여순 14연대가 봉기를 일으키며 발표한 글에 나와 있습니다.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 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

결국에는 군경 토벌대에 의해 많은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1만에서 2만이 사망합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45쪽)에는 “이승만에게 여순사건은 위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반대세력을 일거에 쓰러뜨릴 기회였다.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면 사태를 사실대로 보고하거나 축소해야 할터인데 이승만 정권은 오히려 사태를 과장하였다.

Q. 현재 여순항쟁 관련해 어떤 과제들이 남아있나요?
A. 2021년에 제정된 「여순사건 특별법」 이후, 진상규명과 희생자 신고를 받고 있으나 더디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직 진상조사보고서가 발표되지 않았고, 배보상 기준이 미비하고, 4·3과 비슷하게 정명활동이나 희생자 신고 범위, 체계적 교육 등이 더 확대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Q. 이제라도 조속한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이 이뤄져야겠습니다. 이제 의귀리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A. 제주4·3연구소에 의하면, 서귀포시 남원읍에 있는 의귀리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서중면의 면 소재지 마을이 되었습니다. 서중면은 현재 남원읍의 옛 이름인데요. 의귀리는 1925년 면사무소가 남원리로 이전되기 전까지 10여 년간 서중면의 가장 번화했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일본 유학을 다녀오거나 도 내외에서 공부한 진보적 인사들이 다수 있었고, 제주도의 다른 마을들처럼 인민위원회의 활동도 활발했습니다.

Q. 번화한 마을이었네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A. 의귀리는 중산간 마을입니다. 무장대의 활동이 눈에 띄게 격렬해지자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이 무장대의 보급, 은신처가 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주도 전역에 발효되었던 초토화 작전보다 약 열흘 정도 앞서서 이곳 의귀리를 중심으로 하는 남원면 일대 중산간 마을인 의귀리, 수망리, 한남리에 토벌작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당시 주민들은 제사에 참여하거나 밤새 모여서 놀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의귀리에서는 1948년 9월경 군인들이 중산간을 휩쓸고 다닐 때 들에서 촐 베던 일부 주민들이 끌려갔다 온 적이 있지만 이후 마을에서는 별 탈이 없었거든요.
1948년 11월 7일 새벽, 서귀포에 일시 머물던 9연대 군인들은 경찰과 합동으로 남원면에 대한 토벌작전에 나섰습니다. 오전 9시께 수망리 마을에 들어와 총을 쏘며 집집마다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의귀리로 향한 후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불을 질렀습니다. 주민들은 이웃 마을 방화에 놀라 미리 몸을 피해 많은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불을 지르던 군인들 앞에 나섰던 한 가족이 그 자리에서 총살됐습니다. 이날 조부모와 아버지를 잃은 고기정씨는 자신이 10살 때 겪었던 참상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아버지는 고집이 센 분이었습니다. ‘도망 다니면 의심을 받는다’라면서 피신하지도 않았어요. 그날 오전 10시께인데 수망리 쪽에서 연기가 나더군요. 조금 있으니 군인 3명이 집으로 들이닥쳐 불을 지르려 했습니다. 아버지는 ‘말로 하자’며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다짜고짜 아버지를 쏘았습니다. 옆에 있던 할머니가 ‘왜 우리 아들을 죽이느냐’며 달려드니까 할머니도 팡, 할아버지도 팡팡 쏘았습니다. 순식간에 세 분이 즉사했습니다. 그날 의귀리의 인명피해는 우리 집 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고. 3백 호의 가옥 중에 약 20여 호만을 남기고 모두 불에 탔습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도피생활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군인에게 잡혀 제주읍에서 두 달간 수용생활 후 석방됐습니다만 이듬해 7월 화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④, 전예원, 1998, 294쪽

수망리, 의귀리를 불태운 토벌대는 계속해서 이웃 마을 한남리를 덮쳤습니다. 토벌대가 앞의 두 마을을 불태우느라 걸린 시간을 감안할 때 한남리 주민들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더 큰 희생을 치렀어요. 젊은이들은 대부분 피했지만 설마 하는 마음에 남아 있던 노인과 부녀자 그리고 어린아이가 총에 맞거나 불에 타 숨졌습니다. 토벌대는 목표했던 마지막 토벌지역이라 여유가 있어선지 시간을 두고 대부분의 집을 방화했고 노인과 어린이까지 학살하는 등 잔혹성을 더했습니다.

Q. 사전에 소개령도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와서 불을 지른 거군요.
A. 이틀이 멀다고 올라와 방화하면서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을 총살했습니다. 이제 마을에는 아무것도 기댈 것이 없었고 노약자들까지도 피난 대열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을이 불타자 해안 마을로 소개하는 주민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주민은 피신생활을 하게 됩니다. 가족 중에 집 떠난 젊은이가 없는 그래서 아무런 ‘혐의’가 없다고 자신하는 소수의 사람만 해안 마을로 갈 수 있었으니까요. 서로 의지하기 위해 은신처에서도 같은 마을 주민들끼리 살았다고 해요. 고운희 할머니는 피신생활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가끔 마을로 가서 숨겨 뒀던 곡식을 꺼내 왔습니다. 맷돌과 솥도 짊어지고 갔지만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차례가 돌아오지 않아 대충 껍질을 벗겨내 먹는 식이었지요. 그때는 눈도 많이 왔고 참으로 추웠습니다. 그러나 연기가 나면 안 되니까 불도 피우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마을 부근에 숨었는데 토벌 올 때마다 조금씩 위로 오르다 보니 물영아리오름 뒤편이나 민오름 동쪽 냇가에 있는 ‘궤’에서 살았습니다. 또 돌담에 의지해 나뭇가지로 움막을 짓기도 했습니다.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⑤, 전예원, 1998, 138-139쪽

Q.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이네요.
A. 한동안 잘 숨어 지내던 주민들은 의귀국민학교에 2연대 군인들이 주둔하면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낮에만 남원리에서 토벌 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죠. 토벌대가 코앞에 닥친 것이었어요. 군인들은 주둔지 주변을 수색하여 숨어있던 주민들을 잡아다 학교 뒤편 창고에 가두고 걸핏하면 끌어내 총살했습니다.
그러던 1949년 1월 12일 무장대가 의귀국민학교를 습격했습니다. 이날의 습격은 정보가 누설돼 결국 군인 4명과 무장대 5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후 토벌대는 보복학살로 수용 중이던 주민 80여 명을 총살했고 학살 현장 일대에 흙만 씌운 채 방치했습니다. 유족들이 시신을 찾아가지 못하게 막았죠.
그러다 몇 개월 후 마을을 재건하라는 명령에 따라 주민들이 올라와 성을 쌓았는데 그 매장지가 성 안에 있었습니다. 이에 경찰은 한남리 민보단에 지시해 시신을 옮기도록 했고, 민보단은 구덩이 세 개를 파고 시신을 쓸어 담아 매장했습니다.
몇 달 후, 나중에야 소식을 들은 유족들이 시신을 찾기 위해 다시 구덩이를 파헤쳤으나 그때에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어 다시 묻어버렸다고 해요. 그 후 자신의 가족이 매장돼 있다고 확신하는 유족들이 중심이 돼 봉분을 쌓고 성묘하기 시작했습니다. 1976년 ‘세 무덤에 묻힌 사람의 후손들은 같은 친척’이라는 이름의 삼묘동친회를 결성하고 1983년에는 현의합장묘 비석을 세웠습니다.

Q. 희생자의 신원은 어떻게 확인이 되었나요?
A. 2003년 9월 16일 유해 발굴작업을 벌이게 됩니다. 세 개의 묘지는 서로 뼈가 엉켜있었고, 일부는 심하게 부식돼 있기도 했어요. 발굴 결과 서쪽 묘에서는 17구, 가운데 8구, 동쪽에서 14구의 유해가 드러났습니다. 또한 유류품으로 숟가락이며 비녀, 혁대, 총탄들이 출토되었습니다. 현재는 묘를 옮겨서 수망리에 현의합장묘역이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4일에는 현의합장묘 위령제가 봉행 되었고 저도 참석을 했습니다.

Q. 1949년 1월 12일에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나요?
A. 무장대의 시신도 주민들의 시신과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버려졌다가 마을 재건 때 송령이골에 집단 매장되었습니다. 이곳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돼 있다가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단(단장 도법스님)과 제주4·3연구소, 현의합장유족회 등이 벌초해 천도재를 지내고 표지판을 세웠습니다. 2016년에는 의귀마을 4·3길이 개통되면서 안내판이 추가로 설치됐고, 무장대를 상징하는 장소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습니다. 시민단체에서는 매년 1월 12, 4월 3일 위령제를 지내고, 8월 15일에는 벌초까지 진행하고 있는데요. 제주다크투어도 해마다 참여하고 있습니다.

Q. 학교 창고에 갇혔던 사람 중에 살아남은 분도 있을까요?
A. 뒤늦게까지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도 젊은이들은 육지형무소로 넘겨졌다가 6·25가 발생하자 총살되었습니다. 정부가 인정한 의귀리 4·3희생자는 2020년 기준 252명(남 186명, 여 66명)입니다. 처참한 사연만큼이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고생도 컸는데요. 김홍석씨는 군복 입은 아들에게 거부감을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수망리 사람들이 숨었던 ‘사리물궤’ 부근에서 은신생활을 했습니다. 수망리 사람들이 당할 때는 약 2백 미터 거리에 있었지요. 그 후 표선리에서 온 토벌대에게 잡혔습니다. 열한 살이던 나는 도망쳤지만 어린 동생은 거기서 죽었습니다. 난 군인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현충일에 국기를 달지 않습니다. 한 번은 내 아들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입대했던 둘째 아들이 휴가왔을 때인데 정면에선 몰랐지만, 그 아이가 뒤돌아서면서 등을 보이는 순간 갑자기 옛날 군인들 모습이 떠올라 섬뜩했습니다. 내 아들임에도 거부감이 팍 일더군요.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⑤, 전예원, 1998, 144쪽

참고자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2:서귀포시편>, 2021, 제주:도서출판 각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말한다 4, 1997, 서울:전예원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말한다 5, 1997, 서울:전예원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서울: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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