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답사 후기는 좌안정님께서 기고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제주다크투어에서는 시민들과 함께 4·3 유적지 현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적지에 대한 문서는 4·3 연구소에서 발행한 제주4·3 유적 I 개정증보판 (2018년), 제주 4·3 유적 II (2004년)을 참조했습니다. 4·3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온라인 지도에 장소들을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주 4·3 유적지의 현재 모습에 대한 기록은 계속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제주의 역사가 난개발의 광풍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함께 기억해주세요. 각 유적지는 현재 모습을 담은 사진, 유적지 설명, 찾아가는 법, 위도와 경도, 그리고 해당 유적지와 연관된 다른 유적지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제주다크투어 4.3 유적지 지도
“아무런 이유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버린 것이 억울한 것이다” - 김경훈 시, 「아무런 이유 없이」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진행하는 <4·3을 말한다> 강독모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4일(화)도 강독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이날은 강독모임에 함께 하는 선생님들과 아침 일찍부터 만났습니다. 제주다크투어 활동가들의 4·3유적지 기록을 위한 답사에 함께 하기로 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벹도 과랑과랑한게 봄이 온거 닮수다!”(볕이 쨍쨍 내리는 걸 보니 정말 봄이 왔나봅니다) 평소에는 도채비(도깨비) 심술부리듯, 이놈의 날씨가 아주 변덕스러웠는데요. 이날은 답사가는 것을 하늘도 반기는지 봄볕이 아주 따스하게 내리쬐었습니다. 우리는 입고 갔던 외투를 하나씩 벗어던지고 어느새 반팔 차림을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용담레포츠공원에 도착해서 이날 하루 답사 장소를 확인하고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 역할을 분담했습니다. 용담레포츠공원 근처에는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 위령비가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오후 2시 25분, 정부는 치안국장 명의로 각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전국의 경찰국에 하달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예비검속령입니다.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가두어 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로 인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 연행되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예비검속 실행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예비검속 희생자들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요.
제주에서는 예비검속령으로 인해 7월 말부터 8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제주읍과 서귀포, 모슬포 등지에서 여러 차례 총살이 이뤄졌습니다. 당시 제주시 북부지역에서도 많은 주민들이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알몸 차림으로 먼 바다에 수장되거나 현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주변에서 총살돼 암매장되었습니다.
용담레포츠공원 한켠에 세워진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위령비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인근에서 여러 차례 유해발굴을 실시했지만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들의 유골은 발굴되지 않아 희생자 유가족들의 마음은 아직도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위령비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뒤로하고 우리는 또 다른 학살의 장소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바로 도령마루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해태동산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제주공항에서 신제주 방향에 위치한 신제주입구 교차로(7호광장)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당시 수시로 주민 학살이 이뤄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 수 없으나, 제주경찰서 관할 지역의 주민 76명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희생된 날짜나 경위를 알지 못한 것도 것도 모자라 옛 지명까지 빼앗긴 채 살아야 했으니 그 기나긴 세월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4·3 71주년이 되는 해였던 지난해 옛 지명 ‘도령마루’를 되찾았습니다. 학살의 기억도, 이름마저도 빼앗긴 억울한 죽음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것 같습니다. 실제로 4·3 학살터인 이곳 어디에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허탈하기 그지 없습니다. 사실 제주4·3 유적지 대부분이 도령마루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이날 답사에서 수많은 유적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정말 잊을 수 없는 곳 중 하나는 비학동산입니다. 비학동산의 이야기는 강요배 화백의 그림 <부모들>에도 등장해 많이 알려지기도 했었지요. 주민들은 학살이 있었던 팽나무를 여행자들이 계속 찾아오자 끔찍한 학살의 기억이 떠올라, 결국 팽나무를 베어버렸다지요. 팽나무가 사라진 그 자리에 학원동민회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비학동산 학살터에는 4·3을 알리는 안내판 하나, 아무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비학동산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개수동 비학동산 앞밭에서는 1948년 12월 10일 경찰이 개수동 주민과 소개민들을 모아 놓고 그중 36명을 학살했습니다. 이날 주민들을 학살하기 전 경찰은 또 하나의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주민들이 비학동산에 모이자마자 먼저 한 여인을 끌어내어 옷을 전부 벗겼습니다. 그 여인은 배가 부른 임산부였습니다. 토벌대는 여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팽나무에 매달아 놓은 후 경찰 3명이 총에 대검을 꽂고 마구 찔렀습니다. 주민들이 눈을 돌리자 경찰은 "잘 구경하라!" 소리쳤습니다. 이날 희생된 주민의 신원은 지금까지 23명이 확인되었습니다.
4·3이 일어난 지 올해로 72주년이 되었습니다. 유적지를 답사를 함께 다니며 느낀 것은 여전히 완전한 해결을 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과 같이 선거 때만 되면 정치인들 입에서 거론되는 제주4·3의 해결방안들이 말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확실한 피해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주에 발길 닿는 곳 어느 곳 하나 4·3의 기억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감행해왔던 국가권력의 만행, 언제쯤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
태초에 탐라를 창조하고 제주의 사람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주는 수호신 설문대할망이 있습니다. 탐라에서 이 땅을 지켜온 설문대할망은 당신의 두 눈으로 똥물, 오줌물, 흐르는 피눈물을 다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제주 4·3 유적지를 돌아보며 강정 해군기지와 제2공항을 떠올렸습니다. 제주는 용천수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한라산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을 마을 식수로 사용했습니다. 제주의 소중한 자원이 함부로 훼손되고 삶의 터전에서 내몰리고 쫓겨난다면 누구라도 반대 운동을 했을 것입니다.
일제는 제주 땅 곳곳을 파헤쳐 군사기지로 활용해 무기 저장고로 사용하며 토지를 수탈했습니다.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먼저 왜곡된 역사 4·3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미국에게 공식 사과를 요청해야 합니다. 미국은 이제라도 역사의 진실을 직시하고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희생자 유가족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상을 조사해서 기록하고, 4·3 유적지에도 안내 표지판을 세워 한눈에 알 수 있게 표시해야 하는 작업이 곳곳에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올해는 늦깎이 학생 신분으로써, 많은 학습을 통해 제주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데 힘쓸 것입니다. 제주다크투어 활동가들과의 강독 모임과 유적지 기록 활동이 그 시작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