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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주다크투어에서는 오랜만에 4·3유적지 현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유적지에 대한 문서는 4·3 연구소에서 발행한 제주4·3 유적 II (2004년)을 참조했습니다. 4·3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온라인 지도에 장소들을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주 4·3 유적지의 현재 모습에 대한 기록은 계속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제주의 역사가 난개발의 광풍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함께 기억해주세요. 각 유적지는 현재 모습을 담은 사진, 유적지 설명, 찾아가는 법, 위도와 경도, 그리고 해당 유적지와 연관된 다른 유적지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제주다크투어의 온라인 4.3 지도 (업데이트 중)

(사)제주다크투어 4.3 유적지 지도

(사)제주다크투어 활동가들이 4.3 유적지 현장을 누비며 기록한 지도입니다

가벼운 자켓 하나만 걸쳐도 어색하지 않던 어제(23일)와는 달리, 코 끝에 시린 공기가 감도는 오늘(24일)입니다.

제주다크투어는 시민들과 함께 4·3유적지 현장을 기록해오고 있는데요. 올해는 코로나19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시민분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조용히 다녀와야 했습니다. 얼른 상황이 안정되어 시민분들과 같이 현장을 방문할 수 있는 날이 곧 오기를 바라봅니다:)

알뜨르비행장에 위치한 사진 속 탑은 관제탑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수조시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알뜨르비행장에 위치한 사진 속 탑은 관제탑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수조시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알뜨르비행장에 설치 된 비행기 격납고
알뜨르비행장에 설치 된 비행기 격납고

대정에 도착하자마자 역시나 강한 대정의 바람은 혼을 쏙 빼놓기도 했는데요. 그 와중에도 4·3의 현장은 여전히 그 자리를 힘 있게 지켜주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먼저 도착한 알뜨르 비행장은 일제강점기 때 비행장 터였습니다. 일본이 대정읍 상모리 너른 벌판에 제주도민 등을 동원하여 건설하였고 지금 제주국제공항 자리인 정뜨르 비행장과 더불어 일제의 군사시설이었습니다.

중일전쟁(1937년) 때 이곳을 전초 기지로 해서 일본 비행기를 주유하고, 중국 전역을 공습했다고 합니다. 해방 후 한국전쟁(1950년)이 발발하면서 알뜨르 비행장은 우리 군의 훈련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멀리 한라산이 널리 펼쳐지고, 옆으로는 산방산과 송악산이 자리하며 바다와 바로 인접한 이 아름다운 땅에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상흔이 남아있습니다.

섯알오름 고사포진지
섯알오름 고사포진지
섯알오름 학살터에 남은 흔적, 물웅덩이
섯알오름 학살터에 남은 흔적, 물웅덩이

알뜨르 비행장을 지나 섯알오름 탄약고터로 향했습니다. 섯알오름 탄약고터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할 때, 모슬포를 중심으로 한 제주도 서부지역의 예비검속자 195명(대정지역 132명, 한림지역 63명)을 학살한 장소입니다. 한 무리는 한림 어업창고에서, 다른 한 무리는 대정 절간고구마 창고에 갇혀있다가 섯알오름으로 끌려왔습니다. 갇혀있던 주민들은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가두어 놓겠다’는 ‘예비검속’에 의해 희생됐습니다.

학살은 해병대 모슬포 부대에 의해 자행되었고 해병대원들은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 미리 도착해 일렬종대로 서서 대기하고 있다가 트럭에 실려 온 민간인들을 한 사람씩 끌고 가서 굴 입구에 세워놓고 학살했습니다. 1950년 음력 7월 7일(양력 8월 20일) 새벽 2시에 63명(한림어업창고 및 무릉지서 구금자), 새벽 5시에 132명(대정 절간고구마 창고 구금자)이 섯알오름에서 학살당했습니다.

섯알오름 옆 바다

섯알오름 옆에는 푸른 빛을 뽐내는 바다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이 곁에 있기에 더욱 처연하게 느껴졌던 섯알오름 학살터입니다. 제주도 곳곳에 얼마나 많은 비극이 있었을까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것 같습니다.

백조일손묘지(백조일손지지)
백조일손묘지(백조일손지지)
백조일손지묘(백조일손지지)
백조일손지묘(백조일손지지)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가족들이 희생된 장소를 알아내 시신이라도 수습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군경은 유가족들에게 총을 쏘며 위협을 가하며 이를 저지했습니다. 결국 유가족들은 가족의 시신을 남겨두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가족이 당시 느꼈을 비통함이 얼마나 클지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

유족들은 6년이 지난 후인 1956년 5월 18일(음력 4월 9일)에야 가족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이날 수습된 시신들은 모슬포 지역 주민들의 유해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심하게 훼손된 유해는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유족들은 그나마 남아 있는 유골들을 추려 두개골, 등뼈, 팔뼈, 다리뼈 등을 맞춰 모양을 맞춘 후 집단묘역을 조성해 안장했습니다. 그렇게 132명의 유해가 한곳에 묻히게 됩니다. 제주4·3 예비검속 희생자들의 모신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는 그렇게 세워졌습니다. 이 묘역은 ‘조상이 각기 다른 일백서른 두 자손이 한날한시에 죽어 시신이 엉켜 하나의 자손으로 태어나 한곳에 묻힌 땅’이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백조일손지지 위령비 옆에는 5.16 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옛 묘비의 파편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묘역 조성 몇 년 후인 1961년 6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이 묘비를 파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족들을 회유하고 겁박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국가폭력에 의한 비극이 다시 한번 되풀이된 것입니다.

유족들은 이때 파괴된 묘비의 조각들을 각자의 집에 잘 간직했다가 제주4·3 특별법 제정을 앞둔 1999년 6월에야 다시 꺼내놓았다고 합니다.

오늘 둘러본 4·3의 유적지에는 국가폭력에 의해 인권과 생명이 짓밟힌 역사가 서려 있습니다. 이러한 비극적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4·3의 진실규명은 계속해서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제주다크투어는 4·3과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기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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