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주다크투어에서는 시민들과 함께 4·3 유적지 현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적지에 대한 문서는 4·3 연구소에서 발행한 제주4·3 유적 I 개정증보판 (2018년), 제주 4·3 유적 II (2004년)을 참조했습니다. 4·3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온라인 지도에 장소들을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주 4·3 유적지의 현재 모습에 대한 기록은 계속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제주의 역사가 난개발의 광풍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함께 기억해주세요. 각 유적지는 현재 모습을 담은 사진, 유적지 설명, 찾아가는 법, 위도와 경도, 그리고 해당 유적지와 연관된 다른 유적지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제주다크투어 4.3 유적지 지도
제주다크투어 활동가들은 지난 4월 18일(토) 제주시 원도심 지역(일도, 이도, 삼도, 건입)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이번 답사에는 강호진 제주다크투어 운영위원의 안내로 <4·3은 말한다> 강독모임 참가자들과 함께했습니다.
제주시 원도심 지역은 ‘제주시내 원도심 다크투어’ 기행마다 지나가는 곳이기도 하고 사무실 근처라 자주 지나쳐가는 유적지이지만 이번 기행은 특히 평소에 방문하지 못했던 유적지들을 꼼꼼히 둘러볼 수 있는 기회였어요.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 4·3의 흔적들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다녀온 곳 중 거의 대부분의 장소는 4·3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습니다. 당시의 건물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4·3에 대한 안내판 하나 제대로 세워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답사는 관덕정에서 출발했습니다. 관덕정은 제주 현대사에서 한 획을 그은 장소입니다. 1947년 3월 1일 3·1절 발포사건이 벌어졌고 이는 1년 뒤 4·3 발발의 도화선이 됩니다.
관덕정 광장 옆 지금은 제주목관아지가 재현된 곳에 제주경찰서, 제주지방법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장 바로 뒤엔 제주북국민학교(현 제주북초등학교)가 위치해 있습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대회가 열렸던 관덕정 광장으로 가봅니다. 해방 이후 일제강점기에 고향을 떠났던 제주도민들이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그 규모는 무려 7만 명입니다.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에서 벗어난 제주도민들의 열망은 엄청났습니다. 우리 손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자는 꿈은 커져만 갔습니다. 1919년 3월 1일 일제에 맞섰던 해방운동가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통일된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기념대회에서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이었던 안세훈의 개회사가 분명히 보여줍니다.
“3.1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
이날 3.1절 28주년 기념대회에는 3만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기념대회가 열렸던 제주북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였습니다. 제주읍 외에도 10개 면에서도 별도의 기념식이 열렸는데 각 지역 기념식에도 수천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념대회가 끝나고 해산하는 과정에서 기마경찰이 탄 말의 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벌어집니다. 기마경찰이 아무런 조치 없이 가버리자 격분한 군중의 항의로 경찰이 그들을 향해 총을 발포합니다. 이날 이곳에서 발포 6명이 희생되고 6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이날 경찰의 발포는 분명 과잉진압이었습니다. 희생자 6명 중 한 명을 빼놓고 나머지 모두 등 뒤에 총을 맞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경찰은 이날 이곳에서 도망가는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쏜 것입니다. 발포사건 이후에도 경찰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며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고, 이에 민심은 들끓게 됩니다.
3·1절 발포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린아이를 말발굽으로 찬 기마경관이 제대로 사과했었더라면, 발포사건 이후 경찰과 미군정이 제대로 된 진상조사를 실시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더라면.
수많은 ‘~했더라면’ 가정들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스칩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조일구락부 옛터입니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이 없습니다. 1947년 3월 1일 기념대회가 열리기 불과 6일이었던 그해 2월 23일,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가 이곳에서 결성됐습니다. 3·1절 기념대회 집회 허가를 막으려는 미군정에 맞서 제주의 좌파진영은 이곳에서 결성식을 열면서 위세를 과시했습니다. 조선공산당 등 좌파정당과 노동단체, 농민단체, 청년단체 등 좌파진영을 한데 모은 단체였습니다.
좌파 단체들의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은 ‘건국5칙’을 발표해 당시 사람들이 꿈꾸던 나라의 모습을 알립니다.
“하나, 기업가와 노동자가 다 같이 잘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하나, 지주와 농민이 다 같이 잘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하나, 여자의 권리가 남자와 같이 되는 나라를 세우자!
하나, 청년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를 세우자!
하나, 학생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
이 메시지들이 70여 년 전이 지난 지금에도 울림을 줍니다. 당시의 꿈들을 아직도 이뤄내지 못한 것만 같습니다. 화해, 상생, 번영 등으로 두루뭉술 포장되어 있는 4·3의 정신을 이 문장이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일구락부 옛터는 이후 제주극장, 대한극장, 현대극장으로 간판이 바뀌었습니다. 이곳에 4·3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성산포 경찰서장이었던 문형순이 경찰직을 퇴직한 이후 매표원으로 일했던 곳입니다.
문형순 경찰서장은 1897년 1월 4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해 만주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했습니다. 해방 이후, 1947년 7월 제주에서 경찰로 근무하게 됩니다. 1949년 10월 19일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이후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군 당국은 예비 검속된 주민들에 대한 학살명령을 내렸지만 ‘부당하므로 불이행’하며 거부해 주민들의 희생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권력에 저항은 대가는 컸나 봅니다. 결국 1953년 9월 15일 경찰을 퇴직합니다. 경찰 퇴직 이후 이곳 대한극장(조일구락부, 제주극장 후신)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다가 쓸쓸히 삶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66년 6월 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향년 70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제주시 오등동 평안도민공동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제주도립병원 옛터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춥니다. 3·1절 발포사건이 있었던 그 날 이곳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이곳은 3·1절 발포사건 이후 희생자와 부상자들이 실려 온 병원입니다. 이곳에 병원에 입원해있던 동료경찰을 경호하던 응원경찰이 행인 2명에게 무작위로 발포해 행인들이 크게 다치는 2차 발포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곳 정문에 나 있는 북쪽 도로로 관덕정 광장에서 다친 주민들이 실려 왔을 겁니다. 주민들이 실려 왔던 그 길을 반대로 걸어, 다시 관덕정 광장으로 나아가봅니다.
4.3의 도화선이 된 3.1절 발포사건의 현장들을 돌아보며 당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제주원도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