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리 4·3성→신촌리사무소→연자모루 밭→이덕구 생가터→신촌향사→조천읍 비석거리→조천리 민간수용소 옛터→조천야학당→조천지서 옛터(현 조천파출소)→조천지서 옛터 앞 밭(면민관)→남매상봉기념비
지난 7월 25일, 제주다크투어는 지난 2월 답사를 다녀온 신촌·조천지역을 다시 찾았습니다. 추가로 알려진 4·3 유적지도 찾아가 보고 2월에 방문했던 곳들도 다시 가보았습니다.
마을 안쪽의 올레를 따라 굽이굽이 돌아 나오면 해안가 동산 위의 검은 돌들에 눈길이 멈춥니다. 안내판도 이정표도 없어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곳은 5개월 만에 다시 찾은 신촌리 4·3성입니다. 4·3 당시 무장대의 진입을 막는다며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성담으로 지금은 일부만 남아 당시의 규모를 짐작할 뿐입니다. 성을 내려오는 길에 늦겨울 맞이해주던 갈대 대신 패랭이꽃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내밉니다.
“카네이션의 원조가 사실 패랭이꽃이예요, 일본이 품종개량해서 카네이션이라고 이름 붙였고 그걸 지금 어버이날, 스승의 날 우리는 달아드리고 있는 거죠”. 함께 길을 나서주셨던 고제량 운영위원의 설명에 우리 모두 패랭이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네요. 4·3을 따라 걷는 길은 역사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 전체를 다시 한번 바로 잡아가는 여정임을 깨달으며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신촌리사무소로 향하는 길, 주변 건축물들과 큰 대비를 이루며 높이 서 있는 흰색 탑에 온통 마음이 쏠렸습니다. ‘애향탑’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1976년 당시 신촌 출신 재일동포들의 공사비(3,200만원)지원과 주민들의 노동력(연인원 3,000명)으로 마을 안길 전 구간을 아스팔트로 도로포장을 하게 된 것을 축하하며, 그 마음을 기려 1977년 세운 기념비입니다. 지금의 애향탑은 2001년 3월 신촌빌라 준공으로 인해 2016년 6월, 비슷한 형태와 크기로 신촌리사무소에 다시 세운 것입니다. “떠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품속 같은 고향 신촌!”으로 시작하는 비문에서 71년 전 그날의 아픔들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신촌리사무소를 나와 남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 무장대와 내통했다거나 도피자 가족이라는 혐의로 여러 차례 학살이 있었던 연자모루 밭에 도착했습니다. 주변은 빌라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당시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사진자료를 들고 두리번 두리번, 사진을 찍었던 각도를 찾아내느라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드디어 퍼즐을 맞췄습니다. 그러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모루(동산을 뜻함)’라는 지명만이 그때의 기억을 알려줄 뿐입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언덕을 내려옵니다.
다시 차를 달려 신촌향사를 향합니다. 가는 길에 마당이 예쁜 집이 있어 잠시 멈춥니다. 이 집은 제주4·3 당시 김달삼을 이어 인민유격대(무장대) 2대 사령관으로 활약한 이덕구의 집터로 추정되기도 하는 곳입니다. 마당 한켠에 곧게 뻗은 봉숭아꽃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 등 돌아 나오는 길에 행여나 누가 들을새라 나지막히 읊조립니다.
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 터인데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고운 내 님은 어딜 갔나
- 박은옥 노래, <봉숭아> 가사 일부
정부에서 인정한 신촌리 희생자는 모두 181명(남자 151명, 여자 30명)입니다.
무장봉기 결정을 내린 일명 ‘신촌회의’가 열린 곳으로 알려져 이로 인해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으며 주로 1948년 11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많은 주민학살이 있었습니다. 군경토벌대의 수색과 검문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항일운동의 단심, 조천
발길을 돌려 1919년 제주지역 독립만세운동의 시작, 조천리로 향합니다.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역사는 그대로 해방 이후 조천중학원을 중심으로 좌익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제일 먼저 발걸음이 닿은 곳은 비석거리입니다. 과거 이 지역에 부임한 원님네들의 공덕비들이 먼저 말을 거네요. 조상들의 지혜와 해학이 느껴집니다. 앞선 지도자의 공덕비를 보여주며 다음에도 잘해야 비석 세워 준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잘못하면 평생 남는다고 어르는 것 같기도 해서 말입니다. 누가 할 것 없이 비문 한자 읽기에 열중했습니다. 잠깐 타임머신을 탄 듯 그 시절을 상상해봅니다.
비석거리에서 한 열 걸음 떼었을까요. 파란 지붕 집에 눈길이 머뭅니다. 지난 2월과 달리 단장한 모습이 낯설기만 한 이곳은 옛 정미소 건물로 4·3 당시의 대표적인 집단 수용소입니다. 소개령에 따라 조천리에 피난 온 도피자 가족 200~300명이 수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장소로 1949년 1월과 2월, 수십 명씩 선별적으로 불려 나가 조천지서 앞 밭에서 수차례에 걸쳐 집단으로 총살당했습니다. 녹슨 우편함에는 몇 년 전 전기요금 청구서만 빗물에 젖은 듯 가라앉아 있습니다. 이 문을 나서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차마 저는 가늠하지 못하겠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봅니다. 발길 닿는 곳곳마다 크기만 다를 뿐 표석이 놓여있습니다. 만세거리를 따라 올라가 봅니다. 엄혹한 시절 목숨 내어놓고 독립을 얘기하던 장소들은 참으로 야속하게도 통일조국을 꿈꾸던 사람들의 핏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지금의 조천파출소는 조천지서가 있던 자리입니다. 1948년 3월 6일 조천중학원 2학년생 김용철(21)은 학생위원장이라는 이유로 조천지서에 연행되어 조사받던 중 고문치사 당합니다. 제주도에서의 첫 고문치사 사건입니다. 김용철 학생이 다니던 조천중학원은 지금의 조천보건소 자리, 바로 맞은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파출소 뒤편에는 당시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서외곽을 축성한 성담과 총구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전히 4·3은 현재진행중입니다. 파출소 정문에 2016년 11월 29일자로 세워진 <조천지서 추모·표지석>이 이를 증명하듯 서 있습니다. “(중략) 4·3당시 폭도 무장 기습, 교전 끝에 폭도 2명 사살 전과를 올렸다…4·3당시 순직한 경찰관과 무고하게 희생된 지역 주민들을 추모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제주4·3정립 연구·유족회와 제주4·3경찰유족회의 이름으로 세운 표지석을 보며 원하는대로 만들어가는 것이 역사의 정립인지,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이름 하에 또 다른 왜곡과 갈등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되돌아봅니다.
가던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가 봅니다.
한창 고민 많던 여고시절, 제주시에서 버스를 타고 가장 멀리 가고 싶어 도착한 곳은 그 극장이었습니다. 담담한 듯 빙그레 웃으시며 툭 던지는 고백에 듣는 우리도 같이 웃습니다.
지금은 입구가 굳게 잠긴 구 면민관(극장). 이 주변이 바로 앞서 얘기한 집단총살터인 조천지서 앞 밭입니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평생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했던 곳입니다. 조천지서 앞 밭에서 총살되었다고 확인되는 명단은 105명입니다.
오빠 이름 김권배, 내 이름 김이선
이번 답사를 나서며 함께 한 모두가 가장 궁금해했던 곳으로 갑니다. 제주시 조천읍 신안동의 남매상봉기념비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주소를 입력했더니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곳에 우리 모두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묘가 나와야 할 곳인데 비닐하우스 앞입니다. 다시 차를 후진해서 다음 골목을 찾아갑니다. 그랬더니 막다른 길. 다시 후진해서 조금 전 비닐하우스에 차를 세운 우리는 또 다시 예기치 못한 만남에 놀랍니다. 함께 동행한 운영위원의 지인의 밭이었던 겁니다.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길을 따라 밭에 따라 들어간 우리는 어느새 손에 블루베리 한가득 담고 입에 물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인심에 참외며, 가지며 받아안고 나옵니다. 우리가 궁금해하던 남매상봉기념비를 알만한 단서도 함께 말입니다.
“2008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묘 사이에 이걸 세웠죠”.
정말 안내 없이는 찾아갈 수 없는 곳. 마을 주민분들게 물어 물어 남매상봉기념비를 세운 가족을 찾았습니다. 안내를 따라 밀감나무 사이를 지나 돌담을 넘어 표지석 앞에 섰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큰 외삼촌은 4·3 당시 다 돌아가셨는데…”. 숨을 고르는 우리 앞에서 담담히 꺼내는 가족사에 괜히 눈두덩이가 뜨거워집니다.
“2007년에 우리 어머니하고 큰이모, 외사촌형과 함께 북에 갔습니다. 우리 작은 외삼촌 만나러요. 그때 우리 가족 족보 5권 만들어가서 직접 드렸어요. 일본에 건너간 이모님한테 생존해계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어 이산가족상봉신청을 하긴 했는데 진짜 만나게 될 줄 몰랐죠. 돌아가신 줄만 알았던 삼촌을 만나고 할머니, 할아버지께 알려드리려 이렇게 남매상봉기념비를 세우게 된거죠. 우리 어머니는 작은 오빠도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70세까지 외가쪽 모든 제사를 모셨어요. 지금은 몸이 안 좋으셔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데…” 거침없이 말씀하신던 목소리가 이내 작아집니다. “1세대나 관심 있지, 2세대는 다 관심 없어요. 다들 돌아가시면…”
“오빠 나이 80세, 내 나이 76. 또 만나야지” 2017년 5월 12일에 김이선님이 명찰에 꾹꾹 눌러 쓴 한 글자 한 글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조국의 통일독립을 꿈꾸던 20대 청년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습니다. 다시 만날 그 날에는 누구의 눈치도 없이, 정해진 시간도 없이 서로 맞잡은 손 오래 놓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이 되기를 기도해봅니다.
‘만나야 통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