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다크투어는 5월24일부터 6월21일까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이하 '진상조사보고서'로 표)」를 읽고 토론하는 강독모임을 진행했습니다. 진상조사보고서에서 자세히 다루지 못한 4·3유적지를 방문하여 그것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7월 2일(일) 오전부터 강독모임 참여자들이 모였습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정방폭포 근처에 위치한 '소남(낭)머리'다. 이곳과 정방폭포 일대는 4·3 당시 주요 학살터입니다. 이곳에서는 서귀리뿐 아니라 남원면, 중문면, 대정면 주민들까지 끌려와 학살됐습니다. 이 일대에서 희생된 사람은 대략 250명 정도로 추정하고, 대부분이 1948년 말에서 1949년 초에 희생되었습니다. 지금의 서복전시관 땅에는 1950년대 초반까지 전분공장 2개가 있었다고 하나, 이후 사라졌습니다. 이들이 희생되는 과정에서 시신을 절벽 아래 바닷가로 떨어트리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유족 중에는 영원히 희생자의 시신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유족들 중에는 그래서 물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소남머리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크게 있으나 자세한 역사의 내용을 전달하는 안내판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소남머리 근처에 정방폭포 일대 희생자의 위령공간을 설치하려다 주변 상인들의 반대로 다른 곳에 설치된 것을 보면 안내판이 없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런 아픔이 있는 곳에 '서복전시관'은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고, 마땅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서복전시관이 철거되고, 제주도 산남지방 4·3희생자의 번듯한 위령공간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소남머리에서 나와 서복전시관을 지나 정방폭포 방향으로 가다보면 좌측에 서복전시관의 일부인 작은 연꽃공원이 있습니다. 이 안에 지난 5월 29일에 제막한 정방 4·3희생자 위령공간이 있습니다. 위령공간의 설치물은 폭포수를 떨어트리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위령공간의 안내판을 자세히 읽어보니 250여명 희생자의 목숨을 앗아간 가해주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조만간 수정이 되길 바랍니다. 제막식 당시 이곳 희생자유족회장님께서 산남지방에 마땅한 추모공간이 없었는데, 이번 위령공간 조성으로 그나마 유족들이 희생자의 넋을 기릴 공간이 마련되었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많은 시민들도 방문하여 아름다운 정방폭포에 숨겨진 4·3의 역사를 알릴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위령공간을 나와 정방폭포로 향했습니다. 강독모임 참여자들 모두 제주도에서 살고 있지만 다들 정방폭포를 가는 것은 오랜만이었습니다. 몇일 전에 비가 많이 온 관계로 정방폭포의 물줄기는 힘찼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절벽의 폭포수가 앞에서 언급한 소남머리 일대와 함께 산남지방 최대의 4·3 학살터였습니다. 매표를 하고 정방폭포 입구로 들어오시면 4·3과 관련한 안내판에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영호는 1970년 12월 15일 저녁 9시40분 서귀포항을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중 다음날 새벽 1시20분께 전남 여수시 소리도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326명 승객이 사망했고, 일본 어선을 통해 12명, 우리나라 해경에 의해서는 3명의 생존자만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더 많은 인원 구조되지 못한 것은 이 당시 해경과 정부는 사고가 난 것조차 모르고 있었으며 사고가 발생한 지 12시간이 넘었지만 구조에도 나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사고 발생 40시간 만에 탑승자들이 추위로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결론짓고 이틀째에는 시신 수색을 중지했으며, 1주일 지난 시점에선 정부측은 가라앉은 선체는 당시 기술로는 인양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시신은 최소 18구에서 최다 40구까지만 인양되었으며, 나머지 300여 구는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귤 수확철에 풍랑으로 배 운항이 중단되었다가 출발했던 남영호는 적재 허용량의 4배 이상을 초과하는 귤상자를 담아 출발했고, 이미 15도쯤 기울었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나가 심한 바람을 만나 남영호는 침몰했습니다.
국회차원의 진상조사 시도가 있었으나 별다른 진실이 밝혀지지 못했고, 정부는 가해자에 대한 수사 및 사법처리도 부실하게 대처했습니다. 결국 이 참사는 우리들의 기억에 잊혀졌고, 이후 여러 번의 선박 침몰 사고가 났고.. 그 역사는 흘러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까지 이어졌습니다.
사고 후 1971년에 서귀포항에 위령탑이 세워졌지만 돈내코 중산간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의 위치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정방폭포 공영주차장에서 바다쪽으로 이동하면 공원 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누군가가 꺾어 올려놓은 꽃 한 송이가 올려져 있고, 우리는 잠깐이나마 묵념으로 조난 희생자들에게 추모의 인사를 남겼습니다.
차를 타고 이동하여 찾아간 곳은 서귀동에 있는 여러 수용소 터 중에 대표적인 곳인 '단추공장 터'였습니다. 이곳은 지난해 제주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에서 선정했던 안내판 수정이 필요한 유적지입니다. 최근에 생긴 안내판 덕분에 이 곳을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4·3의 역사를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안내판에는 구체적으로 '누가' 제주도민을 단추공장이었던 건물에 강제로 수용했는지 명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소라껍질 등으로 단추를 만들었던 공장으로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잡혀오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주변의 풀이며, 바다의 해초까지 뜯어먹으며 버텨야 했다고 합니다. 이런 곳이 서귀동에 정말 많습니다. 군인들이 주둔했던 곳 주변에는 수용시설과 고문이나 취조하던 곳, 학살터가 가까이에 있습니다. 실제로 단추공장 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감저창고 터라는 또다른 수용시설이 있습니다.
단추공장터는 최근까지 오래된 관광호텔 건물이 방치되어 있다가 철거되어 지금은 공터로 펜스가 쳐있고, 펜스에는 빛바랜 유적지 QR코드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답사팀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2연대 1대대 본부 주둔지였습니다. 1948년 하반기 9연대가 토벌을 주도하던 때부터 1949년 2연대로 교체된 이후에도 서귀면사무서 옛터 자리였던 이 곳에 군인이 주둔했다고 합니다. 1대대 본부는 산남지방 토벌대의 지휘본부 였고, 특히 1949년 3월 이후 귀순한 주민들이 이곳에서 취조받거나 재판에 넘겨졌다고 합니다. 이후 서귀포시청으로 이용되다가 철거되었고, 지금은 서귀포 자치경찰대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 앞 우측에는 굉장히 오래된 '먼나무'가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949년 토벌을 마친 것을 기념하여 2연대 병사들이 한라산의 먼나무를 옮겨와 심은 것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제주도 기념물 안내판에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먼나무로서는 가장 큰 나무이며, 수관이 사방으로 고르게 퍼져 마치 우산을 펴서 세워 놓은 것 같이 보인다. '라며 기념물로 지정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 나무가 4·3과 관련되었다는 부분이 문제가 되어 기념물 지정이 취소되었고, 지금은 아무런 표식이 없습니다.
'나무는 아무 죄가 없는데, 사람들의 잔인한 역사에 의해 나무만 역사의 죄 값을 치르고 있는 것인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나무입니다.
진상조사보고서 강독모임은 이렇게 끝이 났지만, 제주다크투어는 앞으로 또 의미있는 책을 찾아 시민들과 함께 읽고 나누는 기회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