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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을동엔 코스모스가 활짝 피었습니다
곤을동엔 코스모스가 활짝 피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지난10월 25일(일) 조금 특별한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름하여 <끝나지 않은 세월 : 곤을동에서 수상한집>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제주4·3이 1954년 9월 21일에 끝나지만 사실 제주도에서 4·3은 군부독재 시절까지 이어집니다. 군부독재 시절 조작된 간첩사건과 지긋지긋하게 이어진 연좌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현재 진행형인 4·3을 기억하며 기행은 조작간첩 피해자 강광보 할아버지의 고향 곤을동에서 시작했습니다. 곤을동은 1949년 1월 4일 군경토벌대에 의해 불타서 사라진 빼앗긴 마을입니다.

화북리 곤을동은 불타버린 마을 중에서도 독특한 마을입니다. 해안마을인데도 토벌대가 방화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군경토벌대는 인민유격대 대원 하나가 곤을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는 증언 하나로 곤을동을 불태웠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를 두고 옹기종기 모여 살았을 주민들의 생활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봄에는 유채꽃이, 여름엔 해바라기가, 가을엔 코스모스가 예쁘게 자라는 마을입니다. 빼앗긴 마을 ‘곤을동’은 지금 인근 마을 주민들의 아름다운 산책로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 중 4·3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아름다운 해변에서 72년 전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아름다운 해변에서 72년 전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서둘러 버스에 올라 멀리 성산리 4·3 유적지로 향했습니다. 1시간을 달려 터진목에 내렸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광치기 해변이라고도 합니다. 파도가 칠 때 마다 들리는 ‘쾅쾅’ 소리 때문에 ‘광치기 해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재밌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제주4·3 당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곳입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2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65명의 구좌면, 성산면 주민들이 희생된 곳입니다. 성산동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었던 서북청년단 특별중대가 감자창고에 감금했던 주민들을 이곳에서 총살했습니다.

터진목 인근에는 성산읍 4·3희생자유족회가 세운 ‘성산면 4·3희생자 위령비’가 있습니다.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으로 이뤄진 토벌대는 이곳 터진목에서 주민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을 벌였는데 ‘콩 볶는 소리’가 매일 이곳에서 들려왔다고 합니다. 희생자 명단 옆에 씌여진 유족들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북받쳐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성산일출봉 방향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서북청년단 특별중대가 있었던 성산동국민학교에 다다릅니다. 학생들을 내쫒고 자리를 차지한 서북청년단원들은 주민들을 바로 옆 수용소(감자창고)에 가둬놓고 주민들을 고문했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고문에 이기지 못해 외치는 주민들의 비명소리가 온 마을에 가득 울려 펴졌다지요. 이후 학교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이곳은 벽돌공장으로 쓰이다 지금은 흉물스럽게 방치된 사유지로 남아있습니다.

우뭇개동산에는 쑥부쟁이가 피었어요
우뭇개동산에는 쑥부쟁이가 피었어요

성산일출봉 매표소 바로 왼쪽 해안에 야트막한 동산이 있습니다. 바로 ‘우뭇개동산’입니다. 이날은 보랏빛 쑥부쟁이가 동산을 온통 뒤덮었습니다.

우뭇개는 바로 옆에 있는 해안입니다. 우무(한천)이 많이 자라는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진 곳이지요. 1949년 1월 2일 이곳에서 토벌대는 오조리 주민 20여명을 일명 ‘다이너마이트 사건(또는 던지기약 사건)’으로 집단 총살했습니다.

일본군이 버리고 간 다이너마이트는 주민들이 어로활동을 하는데 많이 사용했습니다. 4·3 당시에는 주민들이 마을 경비를 하며 인민유격대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한 무기로 사용을 했습니다. 하지만 9연대와 맞교대하며 이곳에 주둔한 2연대 군인들은 주민들이 다이너마이트로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다며 마을 이장, 민보단장 등 20여 명을 총살했습니다.

성산지서 옛터에도 들렀습니다. 당시 성산포경찰서로 쓰였던 곳입니다. 문형순 서장이 이곳에 부임해 한국전쟁 당시 내무부 치안국과 해병대가 내린 예비검속 대상자 총살명령을 ‘부당하므로 불이행’하겠다며 주민들을 살려낸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당시 경찰서의 흔적은 사라지고 지금은 2층 규모의 성산파출소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성산지서 옛터 앞에는 4·3을 폭동으로 규정한, 보수단체의 ‘성산지서 추모·표지석’가 세워져 있습니다.

다랑쉬굴의 시신은 정보당국에 의해 강제로 화장되어버렸습니다
다랑쉬굴의 시신은 정보당국에 의해 강제로 화장되어버렸습니다

제주시로 돌아오는 길, 다랑쉬굴에 들렀습니다. 1948년 12월 18일 구좌면 하도리, 종달리 주민 11명이 피신해 있다가 토벌대에 발각돼 희생된 곳입니다. 토벌대는 이 굴을 발견하고 주민들에게 나올 것을 종용했으나 응하지 않자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어 고통스럽게 학살했습니다.

다랑쉬굴은 1992년 제주4·3연구소의 ‘사라진 마을’ 조사 과정에서 동굴과 유해가 발굴되었습니다. 하지만 공개된 지 45일 만에 정보기관과 행정당국의 회유로 유해가 김녕리 앞바다에 뿌려졌습니다. 이후 행정당국은 입구에 시멘트를 발라 입구를 막아 출입을 통제하기도 했습니다. 1992년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도 5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4·3을 겪은 제주도민들에게는 여전히 엄혹한 시절이었지요.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겠다는 유가족들의 소박한 꿈도 이뤄주지 못했으니까요.

기행의 마지막은 <수상한집>입니다. 조작간첩 피해자 강광보 선생님의 집이면서 조작간첩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전시공간입니다. 1960년대 초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가 1979년 제주로 돌아온 강광보 선생님은 당신의 삶을 담담히 회고했습니다. 일본에서 돈을 벌고 고향으로 돌아와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은 고향 제주 땅을 밟자마자 깨져버렸습니다.

공항 도착과 동시에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끌려가 취조를 당하고, 몇 개월 뒤 경찰서 취조를 받았습니다. 몇 년 뒤 보안대의 고문과 취조에 못 이겨 허위진술을 한 끝에 1986년 8월 18일 국가보안법 위반(간첩)으로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아 복역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놓지 않았던 강광보 선생님은 재심을 청구하고 결국 2017년 7월 17일 무죄 확정판결을 받아냈습니다.

군부독재시기 정보당국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마다 수많은 ‘좌익용공 사건’을 조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조작간첩 사건으로 “일본에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관련된 인물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 간첩 활동을 하고 있다”며 무고한 민간인들을 잡아들였습니다.

조작간첩 피해자의 1/3 이상이 제주 출신이었습니다. 4·3 이전부터 그리고 당시까지 일본으로 건너가는 제주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까지도 4·3을 겪은 제주가 ‘좌익의 본거지’, ‘레드아일랜드’라는 시선이 거둬지지 않았습니다.

국가 배상금으로 광보 선생님은 자신의 집을 조작간첩 피해자들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꾸며냈습니다. 조작간첩 피해자로 청춘을 빼앗긴 광보 선생님은 이제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을 지지하는 등 또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활동하고 계십니다.

제주4·3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탄압의 시기, 항쟁의 시기, 대학살의 시기를 지나 우리는 여전히 ‘침묵과 왜곡의 시기’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조작간첩 피해자 강광보 선생님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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