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정권에 저항하는 섬공동체의 역동과 4·3
가을은 단연 독서의 계절이다. 습기가 사라지고 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해보기도 하고,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눈여겨보던 책 몇권을 구매해서 야외 벤치에 앉아 읽기 딱 좋은 계절이다. 우연하게도 최근 4·3 관련한 다양한 신간 도서들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현기영 작가의 3권짜리 장편소설 '제주도우다'가 발간되었다. 현기영은 제주를 대표하고, 4·3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는 1978년 '순이삼촌'이라는 단편소설을 통해 4·3의 역사를 대중에 알린 인물이다. 사실 그에 앞서 4·3의 역사를 다룬 문인으로 김석범이 있다. 그는 일본어로 된 소설 '까마귀의 죽음'을 시작으로 4·3을 주제로 한 다양한 소설을 발표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화산도'는 1965년부터 1997년까지 총 12권을 집필한 대하소설이다.
아마 '화산도' 대하소설 12권을 다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기존의 장편소설이 굉장히 빠른 호흡으로 사건의 서사를 진행한다면, '화산도'는 1948년 2월 말부터 1949년 6월까지 1년 4개월 정도 기간에 대해 30년에 걸쳐 쓰여진 소설이라 소설 속 인물들의 다양한 고민과 생각들이 일기장처럼 기록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번 기행에 화산도를 읽지 않고 참여해야 한다는 부분이 좀 부담이 되긴 했지만, 화산도의 문학적 가치와 의미를 풍부하게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강사를 모셨기에 조금은 가볍게 참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초대한 이번 기행의 강사는 요즘 많이 바쁜 제주민예총의 김동현 이사장이다. 가을이 독서에 계절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더구나 제주민예총은 "제주만의 독특한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해, 제주의 역사 정신을 문화예술의 언어로 표현하고 대중화하기 위해, 제주의 가치를 담은 문화정책을 제안하고 대안을 만들어가기 위한 (중략) 노력하고 있는' 단체다. 이번 기행의 집결지인 관음사 주차장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조금 지쳐보였다. 그러나 기행 참여자들이 모이고 화산도를 중심으로 문학에 숨겨진 4·3의 역사를 이야기를 시작하며 지친 기색은 금방 사라졌다.
관덕정 주차장에 모여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친 후, 첫 기행장소인 관음사 아미봉으로 향했다. 아미봉은 아미산이라도 하는데, 정식 지명은 아니고 관음사 뒷편의 봉우리로 위치하여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곳은 관음사 위쪽에 위치한 나한전(아미당)에서도 더 한라산 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올라갈 때는 관음굴 방향으로 들어가 나한전을 지나 약간의 경사지역을 올라가니 돌무더기로 동그랗게 쌓아 놓은 토벌대의 초소 흔적이 보였다. 원래는 더 높이 쌓여있었다는 데, 지금은 하단부분만 남아있는 듯하다. 이곳에 초소 가 있다는 것은 멀리 무엇을 감시할만한 장소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4·3 당시만 해도 이곳 아미봉에는 높이 자란 나무가 없었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굵거나 연식이 있어 보이는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가 자라기 전에는 이곳에서 제주도 섬 해안가의 움직임을 보거나 무장대의 습격을 감시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4·3 초기에는 관음사 바로 밑, 오등동이나 오라동 주민들이 이곳 근처에 피난 와서 지내거나 무장대가 산속 궤나 굴에 숨어지내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48년 말이 되면서 토벌대가 한라산 깊숙한 곳까지 토벌작전을 진행했고, 이에 관음사 주변 곳곳에 초소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75년이 지난 오늘 그곳에는 풍성한 나무 숲으로 덮여 4·3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는 찾기 어려웠다.
피신왔던 주민들에게 이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여러 곳에 은신하며 게릴라 작전을 폈던 무장대에게, 초소를 만들고 무장대와 전투를 벌였던 토벌대에게 아미봉 그리고 한라산은 무엇이었을지 상상해본다. <화산도> 속에서도 관음사 일대부터 산천단까지 '남승지의 길'이라 할만큼 의미가 크다고 한다. 김동현 이사장의 설명을 들어보면, 남승지는 무장대를 대변하는 인물인 것 같다. 그들은 지식인도 아니었고, 관리층이나 부유한 집안 출신도 아니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평범한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이런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공간이 한라산이다. 토벌대와 무장대를 피해 피난 온 주민들을 품어주던 곳, 절대적으로 열세에 있던 무장대가 게릴라 작전을 펼 수 있도록 숨을 곳을 만들어준 곳이 한라산이다. 조건 없이 뭐든 내주는 곳이다. 이곳은 지식인들, 유지, 토벌대, 미군정이 주로 머물던 섬 해안가와는 대비된다.
일일기행팀은 아미봉에서 다시 관음사로 내려왔다.
관음사는 4·3 당시 깊숙한 산중이라는 여건, 한때 무장대의 본거지였던 어승생악과 가까워 4·3 초기에는 무장대가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다. 무장대는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하는 유격전을 펼쳤다. 피난민들도 이 근처에 자주 머물렀는데 김동현 이사장은 그 이유를 식수 공급이 용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주도 대부분의 식수를 공급하는 장소는 해안가에 몰려있다. 한라산으로 올라갈 수록 식수원을 구하기 어렵다. 그런데 관음사 근처에는 물이 나는 곳이 있어 사람들이 오래 머물기에 좋았다. 그러나 한라산은 곧 도민의 은신처에서 토벌대의 주둔지로 변해버린다.
1949년 무장대에 대한 토벌이 강화되면서 관음사 인근에 주둔한 토벌대와 매복한 무장대 간의 전투로 피난·입산한 주민들도 토벌 대상이 되었고, 아라리 등 피난 온 주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토벌대는 1948년 12월 15일 ‘관음사 전투’를 시작으로, 1949년 2월 12에는 관음사의 모든 전각을 소각했다. 1949년 3월부터는 잔여 무장대의 토벌을 위해 2연대 2대대가 주둔하였다. 이러한 피해는 관음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주도 전체 불교사찰 중에 50여 곳의 사찰이 불타거나 승려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학살되는 등 물적·인적 피해를 크게 입었다. 그러나 4·3의 피해를 증명하기 위한 유족이나 지원조직이 없어서 아직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고, 피해사실 또한 알려지지 않은 실정이다.
실제 관음사를 방문하면 사찰 곳곳에 설치된 4·3유적지 안내판을 찾을 수 있다. 지난해에도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관음사가 촬영지로 방영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그러나 관음사가 가진 4·3의 역사를 아는 시민은 많지 않아, 이에 대한 관심이 더욱 늘어나길 바란다.
<화산도>의 주요 인물인 이방근이 유학 중 반일활동으로 도쿄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전향서를 쓰고 병보석으로 관음사에서 요양을 하다가 읍으로 내려왔다. 한라산, 아미봉과 마찬가지로 관음사는 해방 이후 은신, 회복의 공간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흐름은 다음 장소인 산천단까지 이어진다.
산천단은 1949년 2월 12일 토벌대에 의해 관음사가 모두 전소되는 과정에서 산천단의 소림사가 같이 피해를 받아 사라졌다. <화산도>에서는 산천단 근처 굴에서 이방근이 4·3 기간 악덕 순사부장이던 정세용을 죽이고 자살을 하는 곳이다.
산천단은 제주도 역사 속에서 매우 신성한 곳으로 아직도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다. 김석범 작가는 <화산도>에서 이곳을 남승지가 헤메던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방근이 찾아오는 곳, 이방근이 4·3 기간 악덕 순사부장이던 정세용을 죽이고 자살을 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해안가 민가의 영향이 잘 닿지 않는 이곳이 어쩌면 한라산의 입구인 셈이다. 소설 속에서 남승지는 결국 일본으로 밀항해 살아남았지만 방황하는 인물이다. 이방근은 항일 운동을 하던 젊은이지만 부유한 집안 배경의 영향인지 4·3 항쟁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악덕 순사 정세용을 죽이며, 남승지를 일본으로 보내며, 다음 세대에게 남겨진 변화의 과제와 힘을 넘겨준 인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관덕정은 오랜 시간 동안 제주 역사의 중심에서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광장으로서의 기능을 했다. 특히, 관덕정에서는 제주4·3의 도화선으로 평가받는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했다. 3·1절 기념식이 끝난 후 민중들은 관덕정 일대에서 가두집회를 이어갔다. 이 와중에 기마 경찰의 말밥굽에 어린이가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해당 경찰은 아무런 조치 없이 현장을 이탈하려 했다. 민중들은 이에 항의하며 기마 경찰을 쫓았고, 경찰은 민중들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총을 발포해 어린아이를 업은 여성 등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다치는 일이 벌어진다. 아울러 관덕정 앞마당에는 인민유격대(무장대) 제2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전시되었다.
<화산도>에서는 토벌대가 관덕정 앞에 의도적으로 무장대의 시신을 전시하여 제주도민에게 공포와 혐오를 일으킨 공간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방근이 다방에서 우체국을 바라보던 장면은 지금의순아커피자리에서 건너편의 우체국을 바라본 것일 수 있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관덕정 앞에서 강의를 시작한 김동현 이사장에 따르면, 오랫동안 지배계급 권력의 공간인 관덕정이 4·3과 신축항쟁 등 여러 제주역사에서 피지배계급의 광장이 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관덕정에 놓여진 안내판에는 이러한 역사가 모두 누락되어 있다. 또한 복원을 거치면서 시민의 광장이 봉건사회의 권력을 재현하는 일개 유적지가 되었고, 작은 공연장소로 축소된 면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이곳을 다시 시민의 광장으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지금도 제주에서는 제주시청 앞 광장에서 주로 시민의 목소리를 내는 집회가 열린다. 그러나 이 공간은 매우 좁고, 건물로 사방이 막혀있어 시민의 광장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실질적인 오프라인 공간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제주에는 소통과 공유의 공간이 매우 부족하다. 도내의 다양한 계층이 생산해 내는 의미있는 자료들과 성과가 있지만, 이를 장벽없이 공유하는 아카이브나 플랫폼은 매우 제한적이다. 다른 지방정부에 비해서도 공적 활동의 정보공개 수준이 매우 낮다. 그만큼 시민의 알권리가 제한된다는 것이다. 섬공동체만의 특성과 이를 잘 활용하는 다양한 사례들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인데도, 이를 드러내는 온/오프라인의 공간은 협소하다. 이런 점에서 제주만이 가진 섬공동체의 저항의식이 발현하는 기회가 제한되는 것 같아 아쉽다.
이러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칠성로로 향했다. 칠성이라는 이름은 탐라시대의 ‘칠성단’에서 유래됐다. 일본식 가로명으로 ‘칠성통’이라고 불렸지만, 1960년대 후반서부터 ‘칠성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근대적인 상점들이 자리 잡았고, 그중 양장점 같은 옷가게들이 이곳의 중심이 되었다.
해방 이후, 건국을 준비하는 주요 세력들의 중심지로, 갑자옥, 이발소, 제주약방, 인민위원회 옛터 등이 근처에 있었다. 4·3과 관련해서는 석송여관, 제주신보사, 서북청년회 본부도 이 도로에 있었다. 이 곳들 대부분이 <화산도> 속에서도 유사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칠성로, 관덕정 등 성안에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의 거주지가 존재한다. 김동현 이사장은 김석범 작가가 인물들을 통해 당시의 정세를 잘 보여주기 위해 설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산도>는 분명 소설이지만, 여러 지명이나 장소가 실제 있는 곳을 충분히 유추할 만한 내용이라 소설 속 공간이 이곳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짐작해보며 읽는 재미가 있는 듯 하다. 사실 김석범 작가가 제주에 머문 기간은 매우 짧다. 그래서 실제 지명을 차용했더라도 그가 소설 속에 설정한 공간은 실제와 다를 수 있다. 김동현 이사장은 작가의 말을 빌려 제주는 그의 이데아, 또는 관념적 고향이라고 전했다. 부친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이 많지만 부친의 고향인 제주는 일본에 살면서도 마음을 뗄 수 없는 그의 고향이었던 것 같다. 제주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 별로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여전히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제주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그의 방식대로 12권의 대하소설에 풀어낸 것 같다. 문학이라는 도구는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여전히 읽을 것을 권유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이번 일일기행의 강의를 들으며 제일 새롭게 들려온 단어는 '서울정권'이다. 대통령의 이름 뒤에 붙는 '정권'은 익숙하지만, 특정 도시의 이름이 붙은 표현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제주도라는 섬에서 살아보면 이 표현은 어색하지만 와닿는 표현이다. 제주는 오래전부터 독립적인 의사결정보다는 '중앙'정치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던 경험이 많다. 조선시대까지는 공출과 유배를 위한 공간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군사기지였고, 근대화 이후에는 관광도시, 국제자유도시, 영리병원, 제2공항, 해군기지 등 제주도의 발전과 제주도민의 안녕이 아닌 서울정권(국가, 중앙정부)의 발전에 기여하는 도구였다. 더구나 미군정과 이승만 대통령은 4·3 기간 제주도를 반공세력으로 낙인찍어 대학살을 했다가, 한국전쟁에는 반대로 반공세력 척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집단으로 만드는 등 정치적 희생의 도구로 만들었다. 그러니 제주도에서 서울로 대변되는 육지는 모두 제주도를 이용만하려는 적대적 세력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태극기 아래 같은 국민이 아니라 언제든지 그 권리를 훼손해도 되는 존재로 취급하는 역사적 경험은 제주도만의 섬공동체를 만들었다. 그것이 해녀항쟁, 신축항쟁, 4·3항쟁 등 저항의 모습으로 드러날 때가 있다. 반대로 잔인한 학살을 피하기 위한 기억의 자살, 자발적 침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제주도에서 매년 개최되는 '관악제'마저 늘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던 제주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는 김동현 이사장의 설명이 가슴 한 편을 뜨끔하게 했다. 이제는 침묵을 깨고, 숨죽였던 4·3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영구적이고 분명한 기억을 위해 여행 그리고 문학을 통한 4·3의 역사를 경험을 해볼 것을 시민들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