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적 '도령마루' 일대 뒤집어 서부도시공원 조성
미수습자 최소 5명..희생자 파악 과제로 남은 유적인데
제주의 관문인 제주국제공항에서 차로 5분 거리.
70여 년 전 제주4·3 당시 확인된 것만 최소 76명이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당한 비운의 공간이 있다.
바로 '도령마루'다.
제주다크투어의 강독모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내가 사는 주변에 있는 유적지에 대한 소개를 하는 숙제를 받았다.
지난 10월, 책에서 본 도령마루의 모습을 실제로 확인하기 위해 현장을 찾았는데 깜짝 놀랄 광경을 목격했다.
유적지가 공사장으로 변한 것이었다.
◆ 도령마루, 어떤 곳?
도령마루(제주시 용담2동 1805번지 일원)는 4·3학살터 가운데는 드물게도 도심권에 위치해 있다.
이 일대는 4·3 당시 연동리와 용담리, 도두리, 오라리 등 4개 리(里)가 인접한 교통의 요지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건물이 없이 나무와 수풀이 우거져 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쓴 <4·3은 말한다>와 제주4·3연구소의 <제주4·3유적Ⅰ> 등에 따르면 이곳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확인된 것만 76명에 달한다.
희생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아직 이름을 받지 못한 3살 여자 아이도 이곳에서 희생됐다.
가까이에 용담리, 연동리, 노형리 등 가까운 곳에 사는 주민은 물론, 멀리 소길리나 아라리에 사는 주민들도 이곳에 끌려와 희생됐다.
이 가운데 5명은 아직 시신 수습이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생존'한 학살터 '도령마루'
제주에 개발 광풍이 불며 많은 유적지들이 사라진지도 모른 채 사라졌지만, 도심지에 있는 이곳은 '생존'했다.
역설적이게도 잊혀진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개발 메리트가 그만큼 크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1970년대 제주 개발을 목적으로 국내 한 제과업체가 이곳에 해태상을 세웠다. 이후 어느 순간부터 도령마루는 해태동산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됐다.
1979년 4·3문학계의 선구자였던 현기영 작가가 <도령마루의 까마귀>를 발표하며 이 유적지의 존재가 다시금 알려지기도 했으나, 해태동산이라는 이름을 누르고 원래의 이름을 찾아오진 못 했다. 그렇게 40년 세월이 흘렀다.
이후 제주4·3이 70주년을 맞으며 이 유적지는 재조명됐다. 도령마루라는 본래의 이름도 이 즈음 시민사회단체와 행정의 노력으로 복원됐다.
2019년 4월 6일엔 4·3 당시 이곳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는 해원상생굿이 열렸다. 도령마루 건너편 교통섬에는 높이 3m의 해원방사탑이 조성되기도 했다.
◆도령마루에 무엇이 들어서나?
제주시는 지난 6월부터 이달 중순까지 사업비 9억 3900만원을 투입해 2022년 미세먼지차단숲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도령마루 일대 1.3ha에 느티나무 등 7종의 교목류 809그루와 병꽃나무 등 4종 관목류 1만 1910그루, 초화류 등을 식재하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유적지 훼손은 불가피해 보인다.
실제 현장 방문 당시 커다란 포클레인과 트럭이 유적지를 짓밟고 있었다.
지난 2018년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와 탐라미술인협회가 조성한 안내 팻말도 사라져 있었다.
현장 관계자도, 제주도청 4·3지원과 관계자도 이 팻말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다만, 공원 한쪽에 도령마루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시설을 조성하겠다는 것이 제주도 행정당국의 계획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학살터에 남아 있을지 모를 5명의 희생자 유해 수습에 대한 것은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별도의 유해발굴 계획은 없는 상태이고, 도시공원 조성사업이 추진되면 으레 진행하는 문화재 지표 조사만 이뤄진다고 한다.
아울러 행정 관계자는 지난 여름 4·3희생자유족 관계자를 현장으로 초청해 사업에 대해 설명했다고 말했으나, 4·3희생유족회장과 유족회 사무국장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행정에서는 어떤 대표성을 가진 유족들을 초청했는지 의문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