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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말> 제주다크투어에서는 2022년 4월~10월 <4·3은 말한다> 강독모임 2기를 진행하였고, 총 4명의 참여자들이 실제 생활하는 지역의 4·3유적지와 역사를 소개하는 후기를 작성했습니다. 앞으로 매주 한 편씩 총 4주간 제주다크투어 홈페이지와 오마이뉴스에 연재하여 소개하겠습니다. 그 첫 이야기로 제주다크투어 김잔디 사무국장이 전하는 제주읍 삼도리(현 제주시 삼도동)의 4·3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삼도리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고, 제주도의 정치·경제·문화의 줌심지로 전통문화 유적지인 삼성혈, 관덕정, 향사당, 제주목 관아 등을 보유하고 있다. 1983년 행정도 개편으로 삼도1동과 삼도2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을 갖게 되었다.1)제주시 홈페이지

1999년 7월 9일 제민일보에 연재되었던 <4·3은 말한다>에 따르면, 4·3때에도 삼도리는 제주도청, 제주읍사무소 등 행정기관이 소재한 제주도의 중심지였다. 또한 관덕정 주변에는 제주지검과 지법, 그리고 제주경찰서가 있었고, 제주농업학교에는 연대본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처럼 삼도리는 제주읍의 중심지인데다 각 기관이 소재한 곳이기에 당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많이 살던 마을이기도 했다.

「4·3특별법」에 따른 제주4·3 기간은 1948년 4월 3일이 아닌,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로 정하고 있다. 1947년 3월 1일 삼도리 북초등학교(현, 북초등학교)에서는 제28주년 3·1절 기념집회가 열렸다. 해방 이후 첫 기념대회에 약 3만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으며, 기념식이 끝나자 군중들은 행진을 하며 무근성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관덕정 부근에서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 아이가 치여 다쳤으나, 기마경찰은 다친 아이를 두고 지나갔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옆, 지금의 제주목 관아 자리에 있던 제주경찰서 망루의 무장경찰이 군중을 향해 총을 발포했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6명이 희생되었다. 이들 대부분이 등, 뒤에서 총을 맞았고, 이들 중에는 갓난아기를 안고 집회를 구경 박재옥(여, 22)이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 망루에 있던 무장경찰은 제주도 출신이 아닌 응원경찰로 3·1절 기념대회를 대응하기에 경찰인력이 부족하여 급하게 육지에서 차출된 인원이었다.

이후 6명이 총상을 입어 근처 제주도립병원(현, 제주대 창업보육센터)으로 옮겨졌는데, 병원에 있던 응원경찰 이문규 등 2명이 총상 입은 환자와 의료진에게 발포 등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2명이 더 사망했다. 진상규명을 요청하는 제주도민의 요구에도 당시 경찰조직의 책임자였던 조병옥 경무부장은 3·1절 발포사건은 ‘정당방위였고, 제주도립병원에서 발생한 사건은 ‘무사려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해 제주도민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제주지방법원(현재는 북초등학교 맞은편 제주목 관아 복원된 구역에 해당함)에서는 4·3을 전후하여 무차별적으로 검속된 사람들로 넘쳐났고, 일반재판뿐 아니라 군법회의도 열렸다. 당시 재판을 받고 전국의 형무소로 흩어진 수형인의 대부분이 행방불명이거나 총살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제주북국민학교와 칠성로 사이에 위치한 제주경찰감찰청은 1947년 3·10 총파업 이후 치안유지를 위해 경찰학교를 설립하여 단기교육으로 경찰을 양성했고, 4·3 초기 진압을 담당했다. 한국전쟁 후 무장대의 진압작전을 다시 경찰이 담당하게 되고, 의용경찰대와 향토자위대를 조직하여 잔여 무장대의 귀순공작을 펼쳤다. 토벌대의 한 축이 군이고, 다른 한 죽이 경찰이었으며, 제주도민을 보호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탄압과 학살의 대상으로 다뤘던 대표적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에 스크린골프장이 들어서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이곳에서 세워진 토벌전략들이 얼마나 많은 제주도민들을 폭압하고 학살했는지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는 것 같다.

가장 최근에 철거된 제주4·3의 흔적은 제주극장 건물이었다. 4·3 당시에는 조일구락부로 불렸고, 오랫동안 제주도민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안타깝게도 2018년 12월에 철거되었다. 해방 이후 1947년 3·1절 기념행사를 앞둔 2월 23일 읍·면 대의원과 각 사회단체 대표 315명, 방청객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일구락부에서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가 열렸다.(「4·3은 말한다」 1권 219쪽 참조) 이날 강인수 감찰청장, 패드릿치 대위, 박경훈 도지사가 참석했다는 증언이 있다.(「4·3은 말한다」 1권 381쪽 참조) 이에 앞선 1월 12일 제주도 내 좌파진영의 청년단체 ‘민청’이 결성대회를 갖고 출범하였다.(「4·3은 말한다」 1권 220쪽 참조) 같은 해 9월 30일에는 우파청년 조직인 광복청년단 중심의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단부 결성식을 개최했고, 10월 3일에는 독립청년단 중심의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단부 결성대회가 열렸다.(「4·3은 말한다」 1권 495쪽 참조) 11월 2일에는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모여 제주도지부 결성대회를 갖기도 했다.(「4·3은 말한다」 1권 434쪽 참조) 이후에도 제주극장, 현대극장 등으로 상호명이 바뀌며, 제주도민들에게 문화향유의 기회를 제공했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는 공터로 당시의 흔적이 없다.

1999년 7월 9일 제민일보에 연재된 <4·3은 말한다>에 따르면, 삼도리는 초토화작전의 대상인 무장대의 근거지인 중산간마을이 아님에도 1948년 10월 중순께부터 초토화작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무렵 연대본부가 있는 제주농업학교(현, LH 제주지역본부) 천막에는 연일 주민들이 끌려왔고, 특히 유력인사들을 대거 잡아들였다. 법조계, 교육계, 언론계, 공직자 등 이름만 대면 누구라도 알 만한 사람들이 끌려갔다. 농업학교 “천막수용소에 한 번쯤 갖히지 않은 사람들은 유명인사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수용소에서의 모진 고문 끝에 많은 유력인사들이 희생되었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에 토지주택공사 제주본부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고 오래된 왕벚나무 가로수 터널이 드리워져 당시 많은 도민들이 잡혀 와 고문에 시달리던 장소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던 관덕정, 지금도 아이들이 뛰노는 북초등학교, 이제는 공터가 된 조일구락부, 전농로 벛꽃길 뒤 제주토지주택공사 사무실 등이 사실은 제주4·3의 시작과 토벌과 학살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역사를 알고 나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 장소 어디에도 4·3의 역사를 알려주는 안내판을 찾을 수 없다. 설령 당시의 건물이 사라졌더라도 우리는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이를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성장과 발전이라는 좋은 핑계로 우리는 너무 빨리, 쉽게 그 흔적을 지워왔다. 지난 70년간 과거의 역사를 지워왔다면, 이제는 다시 기억는 것에 조금의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도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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