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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동문시장과 산지천 부근에서 시작하는 올레길 18코스를 따라 동쪽으로 걷다보면 해안에 나란히 자리잡은 두 오름 사라봉과 별도봉에 이르게 된다. 별도봉이 보여주는 전망에 감탄하며 기슭로 내려오면 돌담만 남은 마을과 마주친다. 이곳이 바로 화북동의 대표적인 4·3 유적 곤을동 옛터다.

곤을동은 1927년 산지항이 개항하기 전까지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하던 화북포구에서 1킬로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바다를 끼고 형성된 자연마을이었다. 주로 멸치를 잡으며 생계를 잇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살던 이 마을은 안곤을, 가운데곤을, 밧곤을(또는 동곤을)로 이루어졌다. 곤을동이 속한 당시 화북리는 1948년 4월 3일 무장대 봉기 직후부터 무장대의 습격과 토벌대의 폭력을 번갈아 겪었다. 그러다가 1948년 말 제주에 주둔하던 기존의 국방경비대 9연대가 2연대로 교체된 직후부터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곤을동이 잃어버린 마을이 된 것도 그즈음이다. 1949년 1월 4일 오후 군인들이 안곤을과 가운데곤을 집집마다 찾아와 불을 붙이며 주민들을 집밖으로 몰아냈다. 마을의 젊은 남자 10명은 곧바로 마을 앞 바다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또 살아남은 남자 10명은 지서로 끌려 갔다가 다음 날 동쪽 바닷가에서 총살당했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던 밧곤을까지 불태워 곤을동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중산간도 아닌 해안마을 곤을동이 이런 희생을 치러야했던 까닭은 여전히 분명치 않다. 마을 사람들은 그즈음 무장대가 인근 일주도로에서 경찰차를 부수고 달아났는데 무장대원 하나가 곤을동 쪽으로 사라졌고 그 일 때문에 곤을동을 ‘폭도의 동네’로 규정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또한 곤을동이 험한 별도봉을 끼고 있는데다 화북 본 마을에서 떨어져 있어 무장대가 숨기 좋은 곳이라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곤을동 사람들은 옆 마을로 옮겨가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거나 움막을 짓고 살다가 서부락이 내준 공유지에 집을 짓기도 했다. 사태가 진정되고 화북포구에서 가까운 밧곤을은 사람들이 돌아와 살고 있고 가운데곤을에는 두어집이 들어섰다. 하지만 화북천 큰 내를 건너야하는 안곤을은 지금까지 완전히 버려져 있다가 4·3의 참상을 생생히 증언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런데 곤을동과 제주의 고난과 비극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어 공식적으로 4·3이 종료된 후에도 끝나지 않는다. 『4·3은 말한다』는 1947년 3월 1일 발포 사건부터 4·3의 경과를 면밀하게 알려주기도 하지만 그 배경이 되는 당시 제주의 사회경제적 상황 특히 제주 사회가 식민지 시기부터 일본 특히 오사카의 한인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도 강조한다. 1920년대 초반부터 정기적으로 제주-오사카 간 직항 선박이 운영되면서 제주인이 대거 이주해 오사카의 조선인 중 60퍼센트 이상이 제주 출신이 되기에 이른다. 이들 중 상당수가 해방 직후 제주로 돌아오지만 다시 4·3 와중에 일본으로 피한 수 또한 5000명에서 1만명 가까이 될 것으로 추산한다. 그후로도 생계가 곤란했던 많은 이들이 일본의 친인척을 통해 건너갔으므로 제주와 일본 사이에 얼마나 많은 밀항선이 오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오사카 한인사회와의 관계는 1990년대까지도 많은 제주인이 4·3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로 작용하기도 한다.

화북동에서 멀지 않은 도련동 주택가에 2019년 문을 연 수상한 집은 그런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작은 기념관이다. 집주인 강광보 선생은 1941년 곤을동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1949년 마을이 불타고 친인척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갓 20대가 된 1962년 일본 오사카 이쿠노쿠에서 가방공장을 하던 큰아버지의 주선으로 목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렇게 먼저 일본에 정착한 친척을 믿고 돈을 벌러가는 것은 그 시절 제주사람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여정은 그가 간첩으로 조작당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고 만다. 그가 1979년 5월 불법체류자로 적발되어 같은 해 7월 제주로 강제 귀국당하자 중앙정보부와 경찰이 찾아왔다. 65일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풀려나지만 1985년 다시 보안대에 체포됐다. 결국 간첩 혐의로 7년형을 받고 1991년에야 석방되었다. 그리고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2017년에야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집계한 재일교포 간첩 조작 사건 109건 가운데 제주 출신이 연루된 사건은 무려 37건에 달한다. 전체 인구의 1퍼센트밖에 안 되는 제주가 조작 간첩 수에서는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이 이상한 비율은 4·3과 직결된다.정통성이 허약한 군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간첩 사건을 터트려서 국면 전환을 시도했는데 가장 손쉬운 조작대상이 제주인이었다. 4·3으로 인한 레드 컴플렉스와 조총련 계열이 강한 재일한인 사회를 엮어 간첩으로 만들면 빠져나가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광보 선생이 감옥에 있는 동안 제주의 부모는 “감옥에서 나오면 그래도 누울 곳은 있어야 한다”며 아들을 위해 작은 집을 지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유행하던 시멘트 블록에 슬레이트 강판을 올린 그 집을 고스란히 두고 그 위에 새로운 집이 올라가 지금의 수상한 집이 되었다. 그래서 이 집은 강광보 선생 자신이 겪은 국가폭력의 기억을 담은 사적인 기념관이면서 제주 사람들이 4·3 이후에도 감내해야 했던 시간을 증언하는 살아있는 기념비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 제민일보 4·3취재반,『4.3은 말한다』1~6권, 전예원, 1997. (6권은 미출판 원고)
  • 제주4·3제50주년 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학민사, 1998.
  • 『수상한 책 111』 Vol.3, 지금여기에, 기억발전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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