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
유적지 개요
관덕정은 1448년(세종 30년) 목사 신숙청 때 군사훈련 목적으로 세워졌다. 이후 관민이 함께 공사를 의논하거나 때로는 죄인을 다스리는 곳으로 쓰여졌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 때는 이곳에 제주경찰감찰청 제1구경찰서 뿐만 아니라 제주지방법원과 세무서도 있었다. 관덕정은 “평소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으로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곳은 1947년 3월 1일 3·1 발포사건이 있었던 현장이다. 이날은 북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을 마친 참가자들이 동서로 나뉘어 시위를 전개했고, 서쪽 행렬이 관덕정 앞을 빠져나갈 즈음 어린아이가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치였지만 경찰이 아무런 조치 없이 가버렸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이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 결과 사상 초유의 3.10 민관총파업이 일어났고 이는 4·3 발발의 도화선이 되었다.
한편 해방 직후에는 각 지역별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왕성히 활동할 즈음인 1945년 9월, 제주에도 건준청년동맹이 결성돼 그 간판이 관덕정 기둥에 걸렸었다. 당시에는 관덕정 정자를 사방으로 막아 사무실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군정이 주둔하면서 건준청년동맹은 인민위원회사무실로 옮겼다. 또 1949년 6월 6일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망하자 그의 시신을 전시해 주민들에게 관람토록 했다.
현재 관덕정 주변에는 당시의 건물들이 대부분 사라져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제주경찰감찰청, 제주지방법원 등 당시 있었던 관공서 건물은 모두 사라졌다. 제주 목관아지와 관덕정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몇차례 보수공사가 이뤄졌다. 제주 목관아지와 관덕정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몇차례 보수공사가 이뤄졌다. 3·1절 발포사건을 알리는 안내판 조차 하나 없어 시민들은 역사의 현장임을 알 길이 없다.
출처
-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Ⅰ>
- 제주4·3연구소, <4·3 길을 걷다>
유적지 정보
- category지역 구분 제주시권
- gps_fixed유적지 위도 33.513640
- gps_fixed유적지 경도 126.521532
- pin_drop유적지 주소 제주시 삼도2동 관덕로 19
유적지 사진
관덕정 안내판(2022.10.13.)
관덕정에서 바라본 원도심(2022.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