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지서 (현 조천파출소)
유적지 개요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조천파출소는 제주4·3 당시 조천지서로, 1948년 3월 16일 이곳에서 조천중학원 학생이었던 김용철이 이곳에서 고문을 당해 숨을 거둔 곳이다. 해방 이후 1947넌 3월 1일, 제주도에서 열린 28주년 3.1절 기념대회 때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사람들이 총에 맞아 숨지고 이에 분노한 사람들이 총파업으로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당시 미군정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년 정도의 시간 동안 약 2,500여명을 검거하는 등 대대적인 색출작전을 펼친다. 조천중학원 학생이었던 김용철은 이 과정에서 조천지서로 끌려가 고문 끝에 숨지게 된다. 김용철이 숨진 후 얼마 뒤 4월 3일 무장대는 봉기를 일으켜 이곳을 습격하기도 했다.
2003년 제주도와 제주4·3연구소가 펴낸 <4·3 유적 I>에 따르면, 1903년부터 연북정에 경찰관 주재소가 있다가 1933년부터 현재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이 주재소는 1945년 10월 국립경찰 창립과 더불어 제8관구 22구경찰서 조천지서로 바뀌었다. 4·3 당시 경찰 및 응원대의 활동 근거지가 됐으며 피의자에 대한 취조 및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또 1948년 4월 3일 무장대가 지서를 습격했으나 지서 경찰관의 선제 사격으로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다음날 무장대는 재차 습격, 교전 중 1명의 무장대원이 사망하고 2명의 경찰관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파출소 뒤편에는 당시 지서 외곽을 축성한 성담과 총구가 그대로 남아있다. 무장대의 습격으로부터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4·3 발발 이후 다급해진 지서가 주민들을 동원해 축성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성담은 높이 3m, 너비 2.5~1.5m에 이르고 있다.
한편 옛 조천지서(현 조천파출소) 길 건너편에는 김용철이 공부했던 조천중학원 옛터(현재 조천보건지소)가 있다. 조천중학원은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과 5.10 총선거 이후 '빨갱이 학교'라는 오명이 붙어 폐원되었다.
또 학살터였던 조천지서 앞밭(조천리 1219-6번지 일대)도 근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은 1949년 도피자가족이라는 이유로 조천면 주민들을 집단학살하던 곳이다. 중산간에서 내려온 주민들은 집단수용소(조천리 2685-1번지)에 갖혀있다가 이곳에서 학살되었다. 약 120여명이 학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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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정보
- category지역 구분 제주시 동부권
- gps_fixed유적지 위도 33.538890
- gps_fixed유적지 경도 126.640043
- pin_drop유적지 주소 제주시 조천읍 신북로 265
유적지 사진
조천지서 성담 모습(2019년 3월 촬영)
조천지서 성담에 남아있는 총구멍(2019년 3월 촬영)
조천지서 전경(2019년 3월 촬영)
조천지서 앞 보수단체 비석(2019년 3월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