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내
유적지 개요
1948년 12월 21일 이른바 '자수사건'으로 조천읍 주민 100여명이 이 곳 박성내에서 학살 당했다.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죄를 자백하면 살려주겠다" 해놓고 자수자를 집단 총살한 사건을 '자수사건'이라고 부른다.
초토화 작전(1948년 11월 이후) 시기, 제9연대는 조천면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자수공작'을 펼쳤다. 토벌대는 "자수하면 살려주지만 나중에 발각되면 총살을 면하지 못한다. 이미 ‘관련자 명단’을 가지고 있다"고 주민들을 협박했다. 자수를 권했다는 사실은 ‘관련자 명단’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지만, 겁에 질린 많은 주민들이 자수했다.
이들은 주로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에서의 활동, 1947년 경찰관의 3‧1절 발포사건에 항의해 시위를 한 사실, 무장대가 마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을 때 이들의 요구에 따라 시위에 참여하거나 식량 등을 준 사실 등을 자수했다.
이 작전으로 군부대나 경찰에 자수 형식으로 출두한 청년들은 함덕리 부대본부인 국민학교의 교실이나 운동장 천막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 중 100여명은 제주 농업학교에 이송됐다가 박성내에서 집단 총살되었다.
제주여자고등학교 입구에서 아라중학교 방향으로 들어서는 하천에 '박석교'라는 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그 하천에서 북쪽으로 20m 정도 내려가면 그 일대가 희생터이다. 하천은 더러 정비되었고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조천읍 주민 김태준(신촌리), 이만식(북촌리)씨가 당시의 상황을 증언으로 남겼다.
김태준씨는 산에 돈 15원을 올린 적이 있어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말에 가다가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연대 본부에서 함께 수용된 다른 주민들 역시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김태준씨는 "맨 처음 트럭에 실린 사람들은 차례로 끌어내려져 냇가 옆에 있는 밭담에 줄지어 세우고는 기관총을 난사하고 두 번째 차의 주민들은 냇가 바위 위까지 끌고 가서 총을 쏘아 냇가 밑으로 굴러 떨어지게 했다"고 증언했다.
이만식씨는 우측어깨와 가슴 사이에 총을 맞고 또 쓰러지면서 떨어지는 충격에 눈까지 다쳤지만 많은 시신들 위에 떨어져 살아날 수 있었다. 군인들이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이씨는 손에 묶인 포승줄은 돌멩이로 끊고 달아나왔다고 한다.
출처: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 4·3아카이브
유적지 정보
- category지역 구분 제주시권
- gps_fixed유적지 위도 33.485605
- gps_fixed유적지 경도 126.543076
- pin_drop유적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이동 2421-3 일대
- directions_walk찾아가는 방법 제주시외버스터미널 : 버스(112) 탑승-제주여자중고등학교 정류장 하차(20분 소요) 서귀포시외버스터미널 : 버스(182) 탑승-제주여자중고등학교 정류장 하차(1시간 소요)
유적지 사진
박성내 (2021년 6월 촬영)
박성내 안내판 (2021년 6월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