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사
유적지 개요
1909년 창건된 관음사는 인민유격대(무장대)들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으며, 군 주둔지가 되기도 했다. 또한 인민규격대와 군 토벌대의 치렬한 접전을 번인 격전지이기도 했다.
4·3 봉기 이후에 관음사 주변지역은 인민유격대의 은신처였고, 무장대가 숨울 곳이 많아 주요 활동지였다. 당시 관음사에 기거했던 노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인민유격대장 이덕구와 이세진 스님, 그리고 장교로 보이는 몇 명의 군인과 3~4명의 민간인들이 관음사 별채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9년 1월 4일부터 실시된 대대적인 한라산 공습과 함께 관음사 일대는 토벌대와 무장대간 치열한 격전지였다. 초기에는 인민유격대가 지형지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 정찰기가 집중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인민유격대는 심한 타격을 입고 후퇴하게 되었다. 1948년 5월, 9연대 소속 군인 41명이 탈영하여 인민유격대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되었고, 이들이 관음사에서 집결한 것으로 군은 판단하여 1949년 2월 12일 관음사를 공격하였다. 교전 끝에 무장대는 잡지 못하고, 토벌대의 희생이 발생하여 화가 난 대대장은 법당을 비롯한 8동의 전각이 전소시켰다. 이 과정에서 관음사의 암자인 소림사에서 여승이 종을 치는 모습을 목격한 군인들은 그 종소리가 무장대에게 연락을 취한 것으로 여겨 현장에서 즉결처분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세진 스님은 이후 주정공장에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후, 석방되었다가 1949년 7월 다시 검속되어 산지항 바다에 수장학살 되었다. 관음사 주지였던 오이화 스님은 토벌대 마차에 묶여 고문당하였고, 후유증으로 1950년에 사망하였다.
1949년 3월부터 잔여 무장대 토벌을 위한 2연대의 작전이 강화되면서 관음사에는 제2연대 제2대대 병력이 관음사에 주둔하며 1949년 5월 철수할 때까지 한라산에 있는 무장대를 토벌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경계초소, 숙영지, 무기고, 피난지, 진지동굴 등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또한 관음사 일대에는 아라동과 오라동 주민들이 토벌을 피해 산으로 숨어들 어간 후 피난생활을 했던 흔적과 질그릇 파편 등이 남아있다. 이후 1968년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다행히 개발행위가 제한돼 이어 현재까지 유적이 양호하게 보전될 수 있었지만 최근 들어 자연적, 인위적 훼손이 가속화되고 있어 체계적 관리와 보존 활용 방안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사)제주불교역사문화연구소, <붓다와 제주걷기>, 2024, 제주:도서출판 기억, 149-150쪽.
제주불교4·3희생자추모사업회, <4·3과 제주불교>, 2025, 제주불교신문, 38-45쪽.
유적지 정보
- category지역 구분 제주시권
- gps_fixed유적지 위도 33.42383333
- gps_fixed유적지 경도 126.558166666
- pin_drop유적지 주소 제주시 산록북로 660
- directions_walk찾아가는 방법 관음사 내
유적지 사진
관음사 주둔지 터(2022.12.07.)
관음사 주둔지 터(2022.12.07.)
관음사 4·3역사 안내판(2021.6.3. 촬영)